[중세교회사]11강: 중세의 중요한 교황들

관리자
2025-05-04

중세교회사 11강: 중세의 교황들

 

 1. 서론적 질문: 얼마 전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쳐졌을까요?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남미 최초의 교황이자 예수회 출신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2013년 교황으로 즉위한 그는 교회 안팎에서 청빈과 겸손, 그리고 개혁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바티칸 궁전 대신 작은 숙소에서 생활했고, 고급 리무진 대신 소형차를 타며 소박한 삶을 실천했습니다. 이로 인해 '가난한 이들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타종교인과 비종교인들에게도 깊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인권, 난민, 환경 문제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어 '인류의 양심'이자 '대화의 다리'로 불렸습니다. 세계 언론은 그를 평화와 화해, 인류 공동체의 상징으로 자주 소개했습니다. 그가 존경받은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는 권력과 명예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언제나 낮은 자리에서 약자들과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선종 전 마지막으로 남긴 “주님,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그의 평생을 관통하는 믿음과 사랑, 겸손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한마디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불교, 이슬람, 유대교, 정교회 등 다양한 종교 지도자들도 그를 '평화의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특히 전쟁과 분쟁 현장에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힘썼습니다. 이런 모습은 종교적 경계를 넘어선 존경을 이끌어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권력이 아닌 섬김, 명예가 아닌 겸손입니다. 그는 약자를 향한 사랑과 교회 개혁의 용기를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범에서 섬김의 리더십, 겸손의 영성, 개혁의 용기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그를 평화의 중재자, 가난한 자들의 친구, 겸손한 목자로 기억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중세 교황들의 복잡한 역사와 비교할 때 어떤 연속성과 단절을 보여줄까요? 오늘 우리는 중세 교황들의 '빛과 그림자'를 살펴보며, 교황청이 걸어온 자기 성찰과 갱신의 여정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2. 모범적인 교황들

  교황 레오 1세 (재위 440-461)

  레오 1세는 '대(大)레오'라는 칭호로 불릴 만큼 뛰어난 리더십을 가진 교황입니다. 'pope'라는 칭호는 라틴어 papa(아버지)에서 유래했으며, 처음부터 로마 교황만을 가리키던 용어는 아니었습니다. 초기에 이 칭호는 알렉산드리아 주교와 로마 주교 등 여러 주교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레오 1세 시기부터 로마 교황의 권위가 확고히 강화되면서 'pope'는 점차 로마 교황 전용 칭호로 굳어졌습니다. 레오 1세는 로마 교회의 수장으로서 교황권을 명확히 하며, 교회의 교리와 법적 권위를 높였습니다. 이로써 그는 교황이라는 칭호에 지금 우리가 아는 무게와 위상을 더한 인물로 평가됩니다.그는 훈족의 아틸라가 로마를 공격하려 할 때 직접 만나 설득하여 로마를 구한 일로 유명합니다. 또한 교회의 교리적 통일에도 큰 기여를 했는데, 칼케돈 공의회에서 그가 보낸 서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교회의 정통 교리를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도덕적 권위를 세우고, 교황권의 영적 지도력을 강화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재위 590-604)

  그레고리우스 1세는 『목회 규칙서』를 저술하여 좋은 목자의 덕목과 사명을 설명하며 중세 교회 목회자들의 필독서가 되게 했습니다. 『대전서』에서는 성인들의 기적과 삶을 기록해 중세 경건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고, 특히 성 베네딕투스의 생애로 유명합니다. 그는 그레고리오 성가로 알려진 교회 음악 전통을 정리하고 표준화하여 전례 음악의 발전에도 기여했습니다. 교황청 재정을 재정비하고, 교회 영지를 관리할 행정 체계를 마련했으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급식, 구제, 고아와 과부 돌봄 등 복지 사업을 체계화했습니다. 또한 영국에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를 파견해 앵글로색슨족 선교를 이끌며 유럽 복음화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겸손한 리더십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 1세는 행정가, 목회자, 신학자, 선교사로서 교황직의 다면적 역할을 잘 보여준 인물로 평가됩니다.

  교황 니콜라오 1세 (재위 858-867)

  니콜라오 1세는 중세 초 교황권을 강력히 세운 인물로, 교회법을 보완하여 교황의 최종 심판권을 확립했습니다. 그는 주교와 수도원 임명, 징계 문제에서 교황이 최종 권위를 가진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프랑크 왕국 로타르 2세의 이혼 문제에 개입해 부당한 결혼을 무효로 선언하고, 이를 승인한 주교들을 파문하며 교황권을 강화했습니다. 불가리아 선교에서는 동방 교회와 경쟁하며 교황청의 영향력을 넓히려 애썼습니다. 특히 포티우스 분쟁에서는 동방 교회의 총대주교 임명에 개입해 교황의 승인 없이는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활동은 교황권의 독립성을 세속 권력과 동방 교회 모두에 대해 강조한 사례로 꼽힙니다. 그는 '위대한 교황들'로 평가받으며 중세 교황권 강화의 초석을 마련했습니다. 니콜라오 1세는 원칙적이고 강직한 리더십의 표본으로 오늘까지 기억됩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재위 1073-1085)

  그레고리우스 7세는 당시 교회를 병들게 한 성직매매를 강력히 금지하여 교회의 영적 순수성을 지키려 했습니다. 또한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해 교회 재산의 세습과 귀족화를 막으려 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세속 권력에 휘둘리지 않도록 교황권의 독립성을 강조했습니다. 1077년, 하인리히 4세를 카노사성 눈밭에서 3일간 서 있게 하여 용서를 받는 '카노사의 굴욕'으로 교황권의 절정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하인리히 4세는 세력을 재정비해 로마를 점령하고 대립교황을 세웠습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노르만 군대의 도움으로 탈출했지만, 이들의 약탈로 시민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로마를 떠나 유배지에서 쓸쓸히 생을 마쳤고, 교황권은 한동안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재위 1198-1216)

  인노첸시오 3세는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같은 새로운 수도회 운동을 지원하며 교회의 영적 갱신을 도모했습니다. 당시 성직자들의 부패와 형식주의로 약화된 교회 신뢰를 회복하고, 이단 운동 확산을 막는 데 수도회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는 황제 선출, 왕실 혼인, 주교 임명 등 세속 정치에도 적극 개입했지만, 이를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닌 교회의 도덕적ᄋ영적 질서 수호로 이해했습니다. 결혼을 성사로 보고 이를 수호하려 한 점, 교회 질서를 바로잡으려 주교 임명에 개입한 점 등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교황청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라는 비판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직을 '영적 군주'로 규정하며 교회와 세속의 조화를 꿈꿨지만, 이상과 현실의 긴장을 안고 살아간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는 중세 교황권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상징하는 대표적인 교황입니다.

 


 3. 비판의 대상이었던 교황들

 

  교황 요한 12세 (재위 955-964)

  요한 12세는 교황직을 최악으로 타락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로마 유력 귀족 가문인 투스쿨룸 가문의 아들로, 아버지 알베리크 2세가 교황 선출을 미리 약속해둔 덕분에 불과 18세에 교황이 되었습니다. 당시 교황직은 로마 귀족 가문들의 권력 세습 수단으로 전락해 있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요한 12세는 영적 자질이 전혀 없었고, 방탕한 생활과 권력 남용으로 교황청의 명예를 심각하게 실추시켰습니다. 로마 귀족과의 권력 다툼, 성적 추문, 심지어 교황청 재산 횡령까지 그의 치세는 비판으로 가득했습니다. 결국 그는 로마 귀족들과 성직자들에 의해 폐위당하는 불명예를 겪으며 교황직의 어두운 시기를 상징하는 인물로 기억됩니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재위 1294-1303)

  보니파키우스 8세는 1302년 교서 우남 상탐에서 모든 인간은 교황의 권위에 복종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천명하며 교황권의 절대성을 선언했습니다. 이는 영적 권력뿐 아니라 세속 권력 위에도 교황권이 우위에 있음을 강조한 급진적인 주장이었습니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성직자 과세 문제로 교황과 충돌했고, 보니파키우스는 이에 강력히 맞서며 교황권을 지키려 했습니다. 그의 자신감은 인노첸시오 3세 시대 교황권의 전성기 경험과, 교황권의 신학적ᄋ법적 절대성에 대한 확신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필리프 4세는 군대를 동원해 교황을 체포했고, 보니파키우스는 풀려난 후 충격으로 선종했습니다. 이 사건은 교황권 몰락의 신호탄이 되었고, 곧 아비뇽 유수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교황권의 마지막 절정과 몰락을 동시에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됩니다.  

  교황 클레멘스 5세 (재위 1305-1314)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압력에 굴복해 교황청을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이전한 인물입니다. 당시 로마는 귀족 간 권력 다툼과 폭동으로 혼란스러웠고, 교황청의 안전과 행정 유지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아비뇽은 프랑스 왕실의 보호 아래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교황청의 행정ᄋ재정 운영에도 유리한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정으로 교황청은 약 70년간 프랑스 왕실의 영향 아래 놓이는 '아비뇽 유수' 시대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는 교황권의 독립성을 크게 약화시키고, 교황청의 도덕적, 영적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클레멘스 5세는 중세 교황권 쇠퇴의 문을 연 인물로 평가되며, 그의 선택은 후대 교회 분열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억됩니다.

  교황 우르바누스 6세 (재위 1378-1389)

  우르바누스 6세는 아비뇽 유수 이후 로마로 돌아온 첫 교황으로, 로마 시민들의 압박 속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즉위 초기에 교황청의 부패를 개혁하려 했고, 처음에는 청렴한 개혁자로 환영받았습니다. 그러나 점차 성격적 독선과 권력욕이 드러나면서 사소한 비판조차 용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황청 내 반대파 추기경들이 그의 폭정을 막으려 모의를 꾸미다 발각되자, 그는 이들을 잔혹히 처형하며 공포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교황청 내부 분열로 이어졌고, 프랑스로 망명한 추기경들이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선출했습니다. 이렇게 로마와 아비뇽에 두 교황이 존재하며 교회는 깊은 갈등과 분열, '서방 교회의 대분열(Western Schism)'이라는 역사적 위기에 빠졌습니다. 우르바누스 6세는 개혁자에서 폭군으로, 교황직의 비극적 전환점을 보여준 인물로 기억됩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 (재위 1492-1503)

  알렉산데르 6세는 막대한 뇌물과 정치 거래로 교황에 즉위하며 부패의 상징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는 교황이 되기 전부터 여러 여인들과 관계를 맺어 체사레, 루크레치아 같은 자녀들을 두었고, 교황직에 오른 뒤 이들을 정치적으로 적극 활용했습니다. 당시 교황과 성직자의 독신 서약은 공식적이었지만, 르네상스 시대 교황청은 이미 심각히 세속화돼 스캔들이 흔했습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아들 체사레를 군사 지도자로, 딸 루크레치아를 정략결혼 도구로 삼아 가문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교황청은 연회, 향락, 사치로 물들었고, 영적 권위 대신 세속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교회 타락 이미지를 유럽 전역에 퍼뜨리며 종교개혁의 불씨로 작용했습니다. 화려한 르네상스 후원의 이면에는 탐욕, 암살, 정치 공작이 얽혀 있었습니다. 결국 보르자 가문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부패와 음모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그의 치세는 교황청의 부패를 극단적으로 보여줬으며, 종교개혁 운동의 불길을 지피는 데 일조했습니다. 알렉산데르 6세는 보니파키우스 8세와 함께 교황직 세속화의 정점을 보여준 인물로 평가됩니다.

 

4. 결론적 진술: 하나님의 종들의 종


  이 시간 우리는 교황들의 빛과 그림자를 살펴보며 교황청의 자기 성찰과 갱신의 여정을 함께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레고리우스 1세가 사용한 "하나님의 종들의 종"이라는 호칭은 교회 리더십이 어떤 마음으로 서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교황권은 때로 그 겸손의 이상을 잃고 권력과 부패로 치달았고, 이는 결국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개신교 교회와 목회자들도 이 역사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동일한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교회 리더가 섬김의 자리에서 권력의 자리로 변질될 때 교회는 본질을 잃습니다. 교황들의 이야기는 오늘의 교회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자 교훈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실패에서 배우고, 빛나는 본보기에서 겸손과 갱신의 용기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