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사상]14강: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1484-1531)

관리자
조회수 45


14강: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1484-1531)

 

1. 들어가는 말: 왜 츠빙글리를 공부해야 하는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라는 용어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개혁교회 전통에 속한 한 형태입니다. 특히 스코틀랜드와 영미권에서 발전한 개혁교회가 장로제 정치 형태를 갖추면서 장로교회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반면 스위스, 네덜란드, 독일 일부 지역에서는 “개혁교회”라는 이름이 더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장로교회는 개혁교회 전통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회 전통은 칼뱅의 신학과 제네바 종교개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개혁교회 전통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개혁교회 전통은 칼뱅 한 사람에게서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칼뱅 이전에 이미 스위스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울리히 츠빙글리였습니다.

  츠빙글리는 루터와 같은 시대를 살았습니다.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다면, 츠빙글리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었습니다. 루터가 면죄부와 구원의 확신 문제를 중심으로 중세교회를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을 시작했다면, 츠빙글리는 성경의 권위, 예배 개혁, 성례 이해, 도시 공동체의 개혁을 중심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츠빙글리를 개혁교회 전통의 또 다른 출발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칼뱅이 개혁교회 신학을 더 체계화했다면, 츠빙글리는 그 이전에 이미 취리히에서 성경의 권위 아래 교회와 예배와 도시 공동체를 개혁하려 했습니다. 츠빙글리의 개혁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생애를 따라가며, 그가 어떤 시대를 살았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요 저술을 중심으로, 성례론, 용병제 비판, 재세례파와의 관계, 시의회 중심의 도시 종교개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츠빙글리를 통해 우리는 개혁교회 전통과 관련된 중요한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교회는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성례는 무엇을 가리켜야 하는가? 복음은 교회 안에서 어떤 권위를 가져야 하는가?

 

2. 츠빙글리의 생애

 

1) 인문주의 교육과 성경 연구

  츠빙글리는 1484년 스위스 빌트하우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교육을 받았고, 빈과 바젤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는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에라스무스는 “원천으로 돌아가라(ad fontes)”고 외쳤습니다. 즉, 교회의 전통만 반복하지 말고 성경 원문과 초대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츠빙글리는 헬라어 신약성경을 직접 연구하며, 교회의 권위보다 성경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2) 용병 제도 비판과 사회 개혁 의식

  츠빙글리를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주제가 바로 용병 제도에 대한 비판입니다. 당시 스위스는 가난한 청년들을 외국 군대에 용병으로 보내는 일이 흔했습니다. 프랑스나 교황령 같은 나라들은 스위스 병사들의 전투력을 높이 평가했고, 많은 청년들이 돈을 위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고, 정치 지도자들과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 용병 계약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츠빙글리는 군목으로 전쟁터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전쟁 속에서 인간의 생명이 탐욕과 정치적 계산 속에 소비되는 현실을 직접 보았습니다. 이 경험은 그의 개혁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에게 종교개혁은 단순히 교회의 의식을 바꾸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삶과 사회 구조 전체를 변화시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의 타락뿐 아니라 사회의 부패와 탐욕 역시 개혁의 대상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점에서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루터보다 더 사회적·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 취리히에서 시작된 종교개혁

1  519년 츠빙글리는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 교회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교회력에 따라 부분적인 본문만 읽지 않고, 마태복음을 처음부터 차례대로 강해설교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교회의 전통과 절기보다 성경 자체가 교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설교를 통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비판했습니다: 면죄부 판매, 성직자의 독신제, 성인 숭배, 금식 규정, 미사 중심 신앙, 성상 사용. 이러한 문제들을 비판하면서, 츠빙글리는 “성경에 근거가 없는 것은 교회 안에서 강요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4) 취리히 논쟁과 개혁의 확대

  1523년 취리히 시의회는 공개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츠빙글리는 여기서 “67개 조항”을 발표하며 자신의 개혁 사상을 설명했습니다. 그 핵심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성경이 교회의 최고 권위이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다. 미사는 희생제사가 아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다. 취리히 시의회는 츠빙글리의 입장을 지지했고, 이후 취리히는 본격적인 종교개혁을 진행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수도원 폐지, 성상 제거, 미사 중단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5) 재세례파와의 갈등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처음에는 더 급진적인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츠빙글리와 재세례파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재세례파는 “오직 자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한 사람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다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 때문에 “재세례파”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국가 권력에 의존하는 교회를 비판했습니다. 또한 군복무와 폭력을 거부하는 평화주의 경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츠빙글리 역시 교회의 개혁을 강조했지만, 그는 개혁이 공동체의 질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취리히 시의회와 협력하며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반면 재세례파는 시의회의 결정보다 성경적 확신과 즉각적인 실천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결국 츠빙글리와 재세례파는 갈등하게 되었고, 취리히 정부는 재세례파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재세례파 지도자들은 처형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종교개혁 내부에도 “교회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6) 전쟁과 죽음

  당시 스위스는 여러 주(칸톤)들의 연합체였습니다. 어떤 지역은 가톨릭을 유지했고, 어떤 지역은 종교개혁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갈등은 결국 무력 충돌로 이어졌습니다. 1531년 카펠 전투에서 츠빙글리는 군목으로 참여했다가 전사합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죽은 종교개혁자였습니다. 이 사건은 종교개혁이 단순한 신학 논쟁이 아니라 사회와 정치 전체를 흔드는 거대한 변화였음을 보여줍니다.

 

3. 츠빙글리의 핵심 사상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츠빙글리 사상의 중심에는 성경이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전통 자체를 모두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보다 높은 권위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성경이 명령하지 않은 것은 교회를 구속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츠빙글리는 루터보다 더 급진적이었습니다. 루터는 복음에 반하지 않는 전통은 유지하려 했지만, 츠빙글리는 성경적 근거가 없는 많은 요소들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츠빙글리의 개혁은 예배의 단순화와 성상 제거 같은 방향으로 이어졌습니다.

 

2) 성만찬 이해

  츠빙글리를 이야기할 때 가장 유명한 논쟁은 루터와의 성만찬 논쟁입니다. 루터는 “이는 내 몸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성만찬 가운데 실제로 임재하신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성만찬을 “기념”과 “신앙고백”의 행위로 이해했습니다. 빵과 포도주 자체가 변화하는 것은 아니며,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억하고 공동체가 믿음을 고백하는 표지라는 것입니다.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에서 루터와 츠빙글리는 이 문제로 끝내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루터는 “당신들은 다른 영을 가졌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 사건은 종교개혁 내부에도 중요한 신학적 차이가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3) 교회와 사회

  츠빙글리는 교회와 사회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시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 아래 개혁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취리히 시의회와 협력하며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에게 종교개혁은 단순한 개인의 내면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말씀은 공동체의 질서와 사회 구조까지 새롭게 해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도시 개혁 운동의 성격을 함께 갖게 되었습니다.

 

4. 츠빙글리 사상의 의의와 한계

 

1) 츠빙글리 종교개혁의 의의

  츠빙글리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그가 스위스 종교개혁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교회의 몇 가지 관행을 고치려 한 것이 아니라, 취리히라는 도시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 아래 새롭게 세워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점에서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교회 안의 개혁을 넘어 도시 공동체의 삶과 질서를 바꾸려는 운동이었습니다.

  또한 츠빙글리는 개혁교회 전통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준 인물입니다. 우리는 흔히 개혁교회 전통을 칼뱅과 연결해서 생각하지만, 칼뱅 이전에 이미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성경 중심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개혁교회 신학을 체계화하고 국제적으로 확장했다면, 츠빙글리는 그보다 앞서 스위스 개혁교회의 방향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츠빙글리는 칼뱅과 분리된 낯선 인물이 아니라, 개혁교회 전통의 중요한 출발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츠빙글리의 개혁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성경 중심의 개혁 원리입니다. 그는 교회가 전통이나 교황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아래 서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관습이나 제도는 개혁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태도는 예배, 성례, 성직 제도, 교회 질서 전반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츠빙글리에게 교회는 말씀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기관이 아니라, 말씀 아래에서 판단받고 개혁되어야 하는 공동체였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의의는 츠빙글리가 교회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개혁을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복음을 개인의 내면적 구원에만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용병제 비판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사회적 불의와 경제적 착취, 정치적 타락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판단받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종교개혁은 예배당 안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도시의 법과 제도, 교육과 구제, 시민적 삶의 질서까지 포함하는 개혁 운동이 되었습니다.

 

2) 츠빙글리 종교개혁의 한계 및 오해

  그러나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는 분명한 한계도 있었습니다. 먼저 그는 중세교회의 외적 의식과 상징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때로는 예배의 상징성과 신비성을 지나치게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성상, 음악, 예전적 요소들을 과감하게 제거한 것은 말씀 중심 예배를 세우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예배가 지닌 감각적 깊이, 상징적 풍성함, 신비적 차원이 충분히 보존되지 못했다는 평가도 가능합니다. 개혁은 필요했지만, 때로는 단순화가 지나쳐 예배의 아름다움과 상징성이 약해졌다는 것입니다.

  둘째, 츠빙글리는 취리히 시의회와 매우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종교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 방식은 개혁을 빠르고 강력하게 실행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습니다. 시의회의 결정에 따라 미사가 폐지되고, 성상과 예전이 정리되고, 도시의 제도들이 개혁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와 정치 권력 사이의 긴장이 충분히 유지되지 못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회가 국가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말씀을 증언해야 하는데, 개혁이 시의회의 결정과 너무 밀착되면 교회의 독립성과 예언자적 비판 기능이 약화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셋째, 츠빙글리의 성만찬 이해는 오랫동안 지나치게 기념설로 흐른다는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물론 그의 성찬론을 단순히 "예수님을 생각하는 의식"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는 성찬을 그리스도의 단번의 희생에 대한 기억이며, 구원의 확신을 붙드는 자리로 보았습니다. 또한 성령께서 참여자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나 칼뱅의 성찬론과 비교할 때, 츠빙글리의 성찬 이해가 성례의 신비와 그리스도와의 실제적 교제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계속 제기되어 왔습니다만, 츠빙글리의 성례론 안에 성령의 역할이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5. 정리: 츠빙글리는 무엇을 남겼는가?

 

  개혁교회 전통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요? 우리는 보통 칼뱅을 말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스위스 종교개혁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스위스 종교개혁의 첫 번째 중요한 인물이 바로 츠빙글리입니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개혁교회 신학을 체계화하고 국제적으로 확장한 인물이라면,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개혁교회 전통의 첫 길을 연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츠빙글리를 아는 것은 단순히 "칼뱅 이전의 한 인물"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속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 전통의 뿌리를 더 넓고 깊게 이해하는 일입니다. 개혁교회 전통은 칼뱅만의 전통이 아니라, 츠빙글리와 칼뱅, 불링거와 여러 도시 개혁자들이 함께 형성한 전통입니다. 츠빙글리는 칼뱅과 다른 점도 있었습니다. 특히 성찬 이해에서 두 사람은 완전히 같지 않았습니다. 츠빙글리는 성찬을 그리스도의 단번의 희생에 대한 기억과 구원의 확신으로 보았고, 칼뱅은 성찬에서 성령을 통해 신자가 그리스도와 실제로 교제한다고 더 강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을 거부하고, 성례를 복음과 말씀의 권위 아래 다시 놓으려 했다는 점에서 같은 개혁교회 전통 안에 있습니다.

  츠빙글리는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다시 세우려 했던 개혁자였습니다. 그는 단순히 몇 가지 제도를 고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교회는 무엇에 의해 움직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의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교회를 움직이는 중심은 인간의 전통이나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복음이 단지 개인의 영혼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이후 칼뱅과 개혁교회 전통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장로교 전통에도 깊은 영향을 남기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