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론: 예정론에 대한 오해와 바른 이해
1. 들어가는 말
칼뱅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교리가 예정론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칼뱅을 ‘예정론의 신학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칼뱅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독교강요』를 보면 예정론은 처음부터 등장하지 않습니다. 칼뱅은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는지, 그리고 교회와 성례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설명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예정론을 다룹니다.
이것은 칼뱅에게 예정론이 신학의 출발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예정론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의 사역을 통해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설명한 후에, 성도가 그 은혜 안에서 자신의 구원을 더 깊이 확신하도록 돕는 교리입니다. 예정론은 “나는 선택받았는가, 누가 버림받았는가”를 추측하게 만드는 교리가 아니라, “나의 구원이 왜 흔들리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주는 교리입니다. 그 답은 분명합니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능력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2. 예정론은 어디에서 나온 교리인가?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예정론이 칼뱅이 새롭게 만들어 낸 교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정론을 칼뱅주의의 독특한 교리로 생각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라는 주제는 이미 신약성경 안에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또한 로마서 8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정이 추상적인 운명론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예정은 차갑고 기계적인 결정론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의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붙드시며, 끝까지 구원하신다는 고백입니다.
교회사 속에서도 예정론은 오랫동안 논의되어 온 주제였습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공로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의 근거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역사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9세기에는 고트샬크와 에리우게나 사이에 예정론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고트샬크는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를 함께 주장했고, 이에 대해 에리우게나는 반박했습니다. 이 논쟁은 예정론, 특히 이중예정의 문제가 칼뱅에게서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러 칼뱅은 예정론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확신이라는 맥락에서 다시 정리했습니다. 칼뱅은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공로, 결단,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예정론을 들으면 곧바로 칼뱅주의를 떠올리게 된 데에는 후대의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칼뱅 시대에도 예정론은 중요한 교리였지만, 그것이 개혁교회의 대표적인 표지처럼 인식된 것은 주로 17세기 네덜란드 개혁교회 안에서 일어난 알미니우스 논쟁과 그 논쟁을 종결시켰던 도르트 총회 이후였습니다. 도르트 총회는 하나님의 선택,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구속, 은혜의 역사, 성도의 견인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예정론은 개혁파 정체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교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칼뱅이 갑자기 만든 교리도 아니고, 칼뱅주의만의 독특한 사상도 아닙니다. 예정론은 성경에서 출발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중세 논쟁, 종교개혁, 도르트 총회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오랫동안 고민해 온 신학적 주제입니다.
3. 예정론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
이제 예정론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예정론은 칼뱅주의만의 독특한 교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정론을 칼뱅주의만의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을 말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했으며, 중세에도 예정론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습니다. 칼뱅은 예정론을 새롭게 발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성경과 교회 전통 안에 있던 예정과 선택의 주제를 종교개혁의 은혜론 안에서 다시 설명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예정론을 단순히 “칼뱅이 만든 교리”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예정론은 칼뱅 개인의 독창적인 사상이 아니라, 성경과 교회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논의되어 온 주제입니다.
2) 예정론은 곧 이중예정론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정론을 들으면 곧바로 이중예정론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미리 정하셨다.” 이런 내용만을 예정론의 전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정론을 지나치게 좁게 이해한 것입니다. 물론 칼뱅도 선택과 유기의 문제를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구원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그 구원의 은혜 밖에 남겨진다는 문제도 다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칼뱅에게 선택과 유기의 문제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칼뱅이 이 문제를 어떤 목적에서 다루었는가입니다. 칼뱅의 관심은 “누가 버림받았는가”를 추적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숨겨진 명단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핵심 관심은 “왜 우리가 구원받았는가”였습니다. 그 답은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인간의 결단력도 아닙니다. 인간의 선함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이중예정은 예정론의 한 논쟁적 형태일 수 있지만, 예정론 전체를 이중예정으로 환원해서는 안 됩니다. 예정론의 중심에는 “누가 멸망하는가”가 아니라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3) 예정론은 칼뱅주의의 대표 교리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정론을 칼뱅주의의 대표 교리로 생각합니다. 물론 개혁파 전통에서 예정론은 매우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칼뱅주의의 대표 교리 = 예정론”이라고 단순하게 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칼뱅의 신학 전체를 보면 예정론이 가장 앞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칼뱅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인간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성령의 적용, 교회와 성례를 폭넓게 다룹니다. 예정론은 이 전체 구조 안에서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칼뱅 신학을 예정론 하나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칼뱅의 신학은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령의 사역, 교회의 질서, 성례, 경건한 삶을 포함하는 넓은 신학입니다. 또한 예정론이 개혁교회의 대표 교리처럼 인식된 데에는 후대의 역사적 과정이 있습니다. 특히 17세기 알미니우스 논쟁과 도르트 총회를 거치면서 예정론은 개혁파 정체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교리로 체계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정론이 개혁파 신학에서 중요하다는 말은 맞지만, 칼뱅 신학 전체를 예정론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4) 예정론은 무섭고 폭력적인 교리이다
현대인들이 예정론에 대해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예정론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은 먼저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선택받았는가?”,“혹시 나는 버림받은 사람은 아닌가?”,“하나님이 이미 모든 것을 정하셨다면 인간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 질문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칼뱅이 예정론을 말할 때 중심에 두었던 질문과는 조금 다릅니다. 칼뱅의 핵심 질문은 “누가 버림받았는가?”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질문은 “왜 우리가 구원받았는가?”였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칼뱅에게 예정론은 성도를 공포로 몰아넣는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성도가 자신의 구원을 자기 안에서가 아닌, 하나님 안에서 찾도록 돕는 교리였습니다.
각 사람의 믿음이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 결단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삶이 불안정할 때가 있습니다. 만약 구원의 근거가 자신에게 있다면 우리는 늘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정론은 말합니다. “너의 구원은 너의 약한 손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너를 붙들고 계신다.” 이것이 예정론의 위로입니다.
4. 예정론에 대한 바른 이해
1)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교리입니다
예정론은 인간이 얼마나 강한가를 말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예정론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신 분인가를 말하는 교리입니다. 구원의 시작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구원의 과정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구원의 완성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먼저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붙드셨습니다. 이것이 예정론의 핵심입니다. 예정론은 인간의 능력을 높이는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는 교리입니다. 구원이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2) 예정론은 위로의 교리입니다
칼뱅은 성도를 불안하게 만들려고 예정론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믿는 사람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예정론을 말했습니다. 성도는 때때로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의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예정론은 성도의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하나님께로 돌립니다. “내가 하나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신다.” 이 고백이 예정론의 위로입니다. 예정론은 성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구원은 너의 감정, 너의 결심, 너의 능력에 달려 있지 않다. 너의 구원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
3) 예정론은 은혜의 교리입니다
예정론은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라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다른사람보다 더 선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더 똑똑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며, 더 종교성이 뛰어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예정론은 교만을 무너뜨립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를 우리 안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예정론은 감사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정론에 대한 바른 이해는 성도를 겸손하게 만들고, 감사하게 만들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듭니다.
4) 예정론은 운명론이 아닙니다
예정론을 어려워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을 운명론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정론을 들으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말인가?”, “인간은 꼭두각시인가?”, “내 선택과 삶은 아무 의미가 없는가?” 그러나 기독교의 예정론은 운명론이 아닙니다. 운명론은 비인격적인 힘이나 정해진 질서가 인간의 삶을 기계적으로 지배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인격적인 사랑도 없고, 구원의 목적도 없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예정론은 인격적이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차가운 운명처럼 인간을 조종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시며, 끝까지 붙드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인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교리가 아닙니다. 예정론은 구원이 우연이나 운명이나 인간의 불안정한 의지에 달려 있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 위에 서 있음을 말하는 교리입니다.
5) 예정론은 인간의 책임을 없애는 교리가 아닙니다
예정론을 들을 때 많은 사람들이 던지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셨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가?”, “하나님이 택하실 사람을 이미 정하셨다면 전도는 왜 해야 하는가?”, “믿음과 회개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떻게 답을 하느냐에 다라 개혁교회 교리가 될 수도 있고, 구원파 이단의 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믿음과 회개를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성경 안에서 함께 나타납니다.
예정론은 인간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 주어진 교리가 아닙니다. 예정론은 전도와 신앙생활을 무의미하게 만들기 위한 논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응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붙드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신앙의 길을 걸어갑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예정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전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는 방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믿음과 회개도 하나님의 은혜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믿음과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 안에서 열매 맺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인간의 책임을 없애는 교리가 아닙니다. 예정론은 인간의 책임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해하게 하는 교리입니다.
5. 왜 현대인은 예정론을 어렵게 느낄까?
그렇다면 왜 같은 예정론이 어떤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될까요? 그 차이는 예정론 자체보다, 우리가 이 교리를 어떤 자리에서 읽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예정론을 논리로만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정론을 들으면 곧바로 머릿속에서 여러가지 질문들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교리는 단지 논리적 퍼즐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리는 언제나 공동체의 삶 속에서 고백되고 사용됩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받는 소수였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고백은 황제가 역사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를 다스리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후대에 예정론으로 정교하게 표현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의 신앙은, 이런 고난의 자리에서 성도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루터파는 어느 정도 제도적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개혁파는 그 보호 범위 안에 충분히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기본적으로 가톨릭과 루터파 사이의 정치적 타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위그노, 네덜란드 개혁교회,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오랫동안 불안정한 정치적·종교적 상황 속에서 박해를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약했고, 사회적으로 위협받았으며, 때로는 고향을 떠나야 했고, 때로는 감옥과 순교의 자리로 내몰렸습니다. 그들에게 예정론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정론은 이런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은 아니다.”“세상은 우리를 정죄하고 밀어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붙드신다.”“우리의 생명과 미래는 권력자의 손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 있다.” 이것이 그들에게 예정론이 가진 위로와 희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정론을 어렵게 느끼는 이유는 교리를 주로 논쟁 속에서 배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정론을 교리 논쟁, 논리적 난제, 철학적 문제로 먼저 접합니다. 그러나 역사 속의 많은 성도들은 예정론을 감옥에서, 망명지에서, 박해의 현장에서, 순교의 자리에서 고백했습니다. 같은 교리이지만, 그 교리가 사용된 삶의 자리가 달랐던 것입니다. 예정론은 편안한 자리에서 타인을 판단하기 위한 교리가 아닙니다. 예정론은 고난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붙들린 성도가 자신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 위에 서 있음을 고백하는 교리입니다.
19강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론: 예정론에 대한 오해와 바른 이해
1. 들어가는 말
칼뱅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교리가 예정론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칼뱅을 ‘예정론의 신학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칼뱅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독교강요』를 보면 예정론은 처음부터 등장하지 않습니다. 칼뱅은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는지, 그리고 교회와 성례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설명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예정론을 다룹니다.
이것은 칼뱅에게 예정론이 신학의 출발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예정론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의 사역을 통해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설명한 후에, 성도가 그 은혜 안에서 자신의 구원을 더 깊이 확신하도록 돕는 교리입니다. 예정론은 “나는 선택받았는가, 누가 버림받았는가”를 추측하게 만드는 교리가 아니라, “나의 구원이 왜 흔들리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주는 교리입니다. 그 답은 분명합니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능력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2. 예정론은 어디에서 나온 교리인가?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예정론이 칼뱅이 새롭게 만들어 낸 교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정론을 칼뱅주의의 독특한 교리로 생각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라는 주제는 이미 신약성경 안에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또한 로마서 8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정이 추상적인 운명론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예정은 차갑고 기계적인 결정론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의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붙드시며, 끝까지 구원하신다는 고백입니다.
교회사 속에서도 예정론은 오랫동안 논의되어 온 주제였습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공로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의 근거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역사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9세기에는 고트샬크와 에리우게나 사이에 예정론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고트샬크는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를 함께 주장했고, 이에 대해 에리우게나는 반박했습니다. 이 논쟁은 예정론, 특히 이중예정의 문제가 칼뱅에게서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러 칼뱅은 예정론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확신이라는 맥락에서 다시 정리했습니다. 칼뱅은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공로, 결단,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예정론을 들으면 곧바로 칼뱅주의를 떠올리게 된 데에는 후대의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칼뱅 시대에도 예정론은 중요한 교리였지만, 그것이 개혁교회의 대표적인 표지처럼 인식된 것은 주로 17세기 네덜란드 개혁교회 안에서 일어난 알미니우스 논쟁과 그 논쟁을 종결시켰던 도르트 총회 이후였습니다. 도르트 총회는 하나님의 선택,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구속, 은혜의 역사, 성도의 견인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예정론은 개혁파 정체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교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칼뱅이 갑자기 만든 교리도 아니고, 칼뱅주의만의 독특한 사상도 아닙니다. 예정론은 성경에서 출발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중세 논쟁, 종교개혁, 도르트 총회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오랫동안 고민해 온 신학적 주제입니다.
3. 예정론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
이제 예정론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예정론은 칼뱅주의만의 독특한 교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정론을 칼뱅주의만의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을 말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했으며, 중세에도 예정론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습니다. 칼뱅은 예정론을 새롭게 발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성경과 교회 전통 안에 있던 예정과 선택의 주제를 종교개혁의 은혜론 안에서 다시 설명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예정론을 단순히 “칼뱅이 만든 교리”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예정론은 칼뱅 개인의 독창적인 사상이 아니라, 성경과 교회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논의되어 온 주제입니다.
2) 예정론은 곧 이중예정론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정론을 들으면 곧바로 이중예정론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미리 정하셨다.” 이런 내용만을 예정론의 전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정론을 지나치게 좁게 이해한 것입니다. 물론 칼뱅도 선택과 유기의 문제를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구원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그 구원의 은혜 밖에 남겨진다는 문제도 다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칼뱅에게 선택과 유기의 문제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칼뱅이 이 문제를 어떤 목적에서 다루었는가입니다. 칼뱅의 관심은 “누가 버림받았는가”를 추적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숨겨진 명단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핵심 관심은 “왜 우리가 구원받았는가”였습니다. 그 답은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인간의 결단력도 아닙니다. 인간의 선함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이중예정은 예정론의 한 논쟁적 형태일 수 있지만, 예정론 전체를 이중예정으로 환원해서는 안 됩니다. 예정론의 중심에는 “누가 멸망하는가”가 아니라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3) 예정론은 칼뱅주의의 대표 교리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정론을 칼뱅주의의 대표 교리로 생각합니다. 물론 개혁파 전통에서 예정론은 매우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칼뱅주의의 대표 교리 = 예정론”이라고 단순하게 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칼뱅의 신학 전체를 보면 예정론이 가장 앞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칼뱅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인간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성령의 적용, 교회와 성례를 폭넓게 다룹니다. 예정론은 이 전체 구조 안에서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칼뱅 신학을 예정론 하나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칼뱅의 신학은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령의 사역, 교회의 질서, 성례, 경건한 삶을 포함하는 넓은 신학입니다. 또한 예정론이 개혁교회의 대표 교리처럼 인식된 데에는 후대의 역사적 과정이 있습니다. 특히 17세기 알미니우스 논쟁과 도르트 총회를 거치면서 예정론은 개혁파 정체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교리로 체계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정론이 개혁파 신학에서 중요하다는 말은 맞지만, 칼뱅 신학 전체를 예정론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4) 예정론은 무섭고 폭력적인 교리이다
현대인들이 예정론에 대해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예정론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은 먼저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선택받았는가?”,“혹시 나는 버림받은 사람은 아닌가?”,“하나님이 이미 모든 것을 정하셨다면 인간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 질문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칼뱅이 예정론을 말할 때 중심에 두었던 질문과는 조금 다릅니다. 칼뱅의 핵심 질문은 “누가 버림받았는가?”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질문은 “왜 우리가 구원받았는가?”였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칼뱅에게 예정론은 성도를 공포로 몰아넣는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성도가 자신의 구원을 자기 안에서가 아닌, 하나님 안에서 찾도록 돕는 교리였습니다.
각 사람의 믿음이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 결단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삶이 불안정할 때가 있습니다. 만약 구원의 근거가 자신에게 있다면 우리는 늘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정론은 말합니다. “너의 구원은 너의 약한 손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너를 붙들고 계신다.” 이것이 예정론의 위로입니다.
4. 예정론에 대한 바른 이해
1)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교리입니다
예정론은 인간이 얼마나 강한가를 말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예정론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신 분인가를 말하는 교리입니다. 구원의 시작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구원의 과정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구원의 완성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먼저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붙드셨습니다. 이것이 예정론의 핵심입니다. 예정론은 인간의 능력을 높이는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는 교리입니다. 구원이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2) 예정론은 위로의 교리입니다
칼뱅은 성도를 불안하게 만들려고 예정론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믿는 사람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예정론을 말했습니다. 성도는 때때로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의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예정론은 성도의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하나님께로 돌립니다. “내가 하나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신다.” 이 고백이 예정론의 위로입니다. 예정론은 성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구원은 너의 감정, 너의 결심, 너의 능력에 달려 있지 않다. 너의 구원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
3) 예정론은 은혜의 교리입니다
예정론은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라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다른사람보다 더 선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더 똑똑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며, 더 종교성이 뛰어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예정론은 교만을 무너뜨립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를 우리 안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예정론은 감사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정론에 대한 바른 이해는 성도를 겸손하게 만들고, 감사하게 만들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듭니다.
4) 예정론은 운명론이 아닙니다
예정론을 어려워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을 운명론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정론을 들으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말인가?”, “인간은 꼭두각시인가?”, “내 선택과 삶은 아무 의미가 없는가?” 그러나 기독교의 예정론은 운명론이 아닙니다. 운명론은 비인격적인 힘이나 정해진 질서가 인간의 삶을 기계적으로 지배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인격적인 사랑도 없고, 구원의 목적도 없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예정론은 인격적이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차가운 운명처럼 인간을 조종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시며, 끝까지 붙드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인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교리가 아닙니다. 예정론은 구원이 우연이나 운명이나 인간의 불안정한 의지에 달려 있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 위에 서 있음을 말하는 교리입니다.
5) 예정론은 인간의 책임을 없애는 교리가 아닙니다
예정론을 들을 때 많은 사람들이 던지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셨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가?”, “하나님이 택하실 사람을 이미 정하셨다면 전도는 왜 해야 하는가?”, “믿음과 회개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떻게 답을 하느냐에 다라 개혁교회 교리가 될 수도 있고, 구원파 이단의 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믿음과 회개를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성경 안에서 함께 나타납니다.
예정론은 인간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 주어진 교리가 아닙니다. 예정론은 전도와 신앙생활을 무의미하게 만들기 위한 논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응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붙드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신앙의 길을 걸어갑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예정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전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는 방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믿음과 회개도 하나님의 은혜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믿음과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 안에서 열매 맺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인간의 책임을 없애는 교리가 아닙니다. 예정론은 인간의 책임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해하게 하는 교리입니다.
5. 왜 현대인은 예정론을 어렵게 느낄까?
그렇다면 왜 같은 예정론이 어떤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될까요? 그 차이는 예정론 자체보다, 우리가 이 교리를 어떤 자리에서 읽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예정론을 논리로만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정론을 들으면 곧바로 머릿속에서 여러가지 질문들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교리는 단지 논리적 퍼즐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리는 언제나 공동체의 삶 속에서 고백되고 사용됩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받는 소수였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고백은 황제가 역사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를 다스리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후대에 예정론으로 정교하게 표현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의 신앙은, 이런 고난의 자리에서 성도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루터파는 어느 정도 제도적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개혁파는 그 보호 범위 안에 충분히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기본적으로 가톨릭과 루터파 사이의 정치적 타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위그노, 네덜란드 개혁교회,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오랫동안 불안정한 정치적·종교적 상황 속에서 박해를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약했고, 사회적으로 위협받았으며, 때로는 고향을 떠나야 했고, 때로는 감옥과 순교의 자리로 내몰렸습니다. 그들에게 예정론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정론은 이런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은 아니다.”“세상은 우리를 정죄하고 밀어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붙드신다.”“우리의 생명과 미래는 권력자의 손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 있다.” 이것이 그들에게 예정론이 가진 위로와 희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정론을 어렵게 느끼는 이유는 교리를 주로 논쟁 속에서 배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정론을 교리 논쟁, 논리적 난제, 철학적 문제로 먼저 접합니다. 그러나 역사 속의 많은 성도들은 예정론을 감옥에서, 망명지에서, 박해의 현장에서, 순교의 자리에서 고백했습니다. 같은 교리이지만, 그 교리가 사용된 삶의 자리가 달랐던 것입니다. 예정론은 편안한 자리에서 타인을 판단하기 위한 교리가 아닙니다. 예정론은 고난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붙들린 성도가 자신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 위에 서 있음을 고백하는 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