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사상]23강: 존 녹스의 생애와 사상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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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강 존 녹스의 생애와 사상


 

1. 서론적 질문: 정치권력은 교회의 적인가, 동역자인가?

 

오늘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녹스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존 녹스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모습을 떠올리십니까? 아마도 존 녹스라는 이름은 들어봤지만, 생애와 사상을 자세히 접할 기회는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강단에서 거침없이 설교한 종교개혁자였고, 가톨릭 신앙을 지지하는 정치권력과 충돌했으며, 때로는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메리 튜더의 가톨릭 복귀 정책에 반대했고, 1558년에는 여성 군주의 통치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매우 과격한 책까지 출판했습니다. 나중에는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와도 여러 차례 충돌했습니다. 그래서 녹스를 흔히 “저항의 종교개혁자”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녹스의 생애 전체를 살펴보면 이야기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메리 튜더 이전, 에드워드 6세가 잉글랜드를 통치하던 시기에 녹스는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설교자로 활동했고, 왕실 설교자로까지 발탁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녹스는 처음부터 정치권력 자체를 거부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왜 녹스는 어떤 정치권력과는 협력했고, 어떤 정치권력에는 저항했을까요?

이 질문은 지난 시간에 살펴본 종교개혁의 교회론과 정치사상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우리는 교회도 국가도 절대적인 권력을 가질 수 없으며, 교회의 권위도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 있다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정치권력이 교회의 개혁은 돕는 경우와 신앙을 억압하는 경우, 그리스도인은 각각의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을 가지고 존 녹스의 생애를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2.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자가 되다

 

존 녹스는 16세기 초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가톨릭교회의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54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신교 신앙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인물이 조지 위샤트였습니다. 위샤트는 스코틀랜드에서 개신교 신앙을 전했던 설교자로, 녹스는 그의 설교와 사역에 깊은 영향을 받아 한동안 그를 수행하며 보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546년 위샤트는 이단 혐의로 체포되어 화형되었습니다. 그 무렵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단순한 신학 논쟁이 아니라, 어떤 신앙을 고백하느냐에 따라 감옥에 갈 수도 있었고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위샤트가 처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처형한 데이비드 비턴 추기경이 암살되었고, 암살자들과 개신교 세력은 세인트앤드루스 성을 점거했습니다. 녹스도 1547년에 이곳에 합류했고, 바로 그곳에서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처음에 녹스는 자신이 설교자가 되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요청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이면서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군이 세인트앤드루스 성을 함락했고, 녹스는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약 19개월 동안 프랑스의 갤리선에서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경험은 녹스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가 처음 경험한 종교개혁은 안정된 교회 안에서 유력한 영주의 후원 아래에서 이루어진 개혁이 아니었습니다. 박해와 투옥, 망명과 죽음의 위험 속에서 이루어진 개혁이었습니다. 따라서 녹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한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안전과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3. 에드워드 6세의 잉글랜드: 정치권력과 함께 교회를 개혁하다

 

갤리선에서 풀려난 녹스는 곧바로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는 잉글랜드로 갔습니다. 당시 잉글랜드의 왕은 에드워드 6세였습니다. 에드워드 6세 시대의 잉글랜드에서는 종교개혁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왕실이 종교개혁을 실행했고, 교회의 예배와 신학을 개혁하려는 작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녹스는 이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설교자로 활동했고, 이후 왕실 설교자로 발탁되었습니다. 또한 또한 잉글랜드 교회의 예배와 성찬을 둘러싼 논의에도 참여했으며, 1552년 공동기도서 개정과정에서 성찬을 무릎 꿇고 받는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공동기도서에 반영되었습니다.

녹스는 정치권력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정치권력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를 개혁하고 복음을 보호한다면, 오히려 정치권력은 종교개혁의 중요한 협력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녹스의 정치사상을 단순히 ‘국가에 대한 저항’이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 권력 자체의 존재가 아니라 그 권력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에드워드 6세 시대의 경험은 정치권력이 종교개혁의 중요한 협력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1553년 에드워드 6세가 세상을 떠나고 메리 튜더가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4. 메리 튜더와 망명: 정치권력이 신앙을 박해한다면?

 

1553년 메리 튜더가 왕위에 오르면서 잉글랜드의 종교정책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메리는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에드워드 6세 시대에 진행된 개신교 종교개혁을 되돌리고 잉글랜드를 다시 가톨릭 신앙으로 돌려놓으려고 했습니다. 변화는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에드워드 6세 시대에 시행된 개신교적 예배와 종교정책이 철회되기 시작했고, 미사가 다시 시행되었으며, 개신교 성직자들은 직위에서 물러나거나 체포되었습니다. 1554년에는 잉글랜드가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회복했고, 개신교 신앙을 처벌할 수 있는 이단법도 다시 시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1555년부터는 크랜머, 리들리, 라티머를 비롯한 개신교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화형을 당했습니다. 메리의 약 5년간의 통치 기간 동안 수백 명의 개신교도가 이단으로 처형되었고,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이 유럽 대륙으로 망명했습니다.

녹스 역시 이러한 변화 속에서 더 이상 잉글랜드에서 활동할 수 없었습니다. 에드워드 6세 시대에 왕실 설교자로 활동하며 종교개혁에 참여했던 그는 1554년 잉글랜드를 떠나 유럽 대륙으로 망명했습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녹스는 전혀 다른 정치권력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에드워드 6세 시대의 정치권력은 종교개혁을 후원했지만, 메리 튜더 시대의 정치권력은 종교개혁을 되돌리고 개신교 신앙을 억압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은 통치자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신앙을 박해하는 통치자에게도 복종해야 할까요? 통치자의 명령과 하나님의 말씀이 충돌한다면 누구에게 복종해야 할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녹스의 정치사상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제 정치권력은 단순히 교회개혁을 돕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정치권력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며, 그 권위에는 한계가 있는가? 그리고 통치자가 하나님께 받은 권한을 넘어설 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6세와 메리 튜더라는 두 통치자 아래에서의 상반된 경험은 녹스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위와 인간의 권위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5. 제네바: 녹스가 발견한 개혁교회의 모습

 

메리 튜더의 즉위로 잉글랜드를 떠난 녹스의 망명생활은 단순한 피난생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디에프를 거쳐 제네바로 갔고, 이후 프랑크푸르트의 영국인 망명교회에서 목회했습니다. 그러나 예배와 교회질서를 둘러싼 갈등으로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습니다. 이러한 망명생활을 통해 녹스는 박해받는 개신교도들이 어떻게 교회를 이루고, 어떻게 예배하며, 어떤 질서 아래 살아가야 하는지를 실제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중요한 장소가 제네바였습니다.

제네바에서 녹스는 칼뱅이 이끌던 종교개혁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영어권 망명자들의 교회를 목회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던 개혁교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녹스가 제네바에서 단지 정치적 저항사상을 배운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가 본 것은 하나의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에 있는 교회, 성례가 바르게 시행되는 교회, 목회자와 장로가 공동체를 돌보는 교회, 권징을 통해 공동체의 신앙과 삶을 세워가는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제네바는 녹스에게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었습니다.

제네바는 “개혁된 교회는 실제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실제적인 모델을 경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험은 이후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녹스가 원하는 것은 말씀을 중심으로 예배하고, 성례를 시행하고, 목회자와 장로가 공동체를 돌보며, 신자들이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살아가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망명생활을 거치면서 녹스의 정치적 언어도 점점 강해졌습니다. 마침내 1558년 그는 매우 논쟁적인 책인 『여성의 괴물 같은 통치에 반대하는 첫 번째 나팔소리』를 출판합니다. 1558년 녹스의 눈 앞에는 두 명의 강력한 가톨릭 여성 통치자가 있었습니다. 잉글랜드에는 메리 튜더가 있었고, 그의 고향 스코틀랜드에는 메리 오브 기즈가 섭정으로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의 역사적 배경에는 분명 가톨릭 통치와 개신교 박해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녹스는 여기에서 매우 위험한 논리적 확장을 합니다. 특정한 군주의 종교정책과 폭압을 비판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여성이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난다는 주장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해 메리 튜더가 죽고, 개신교 여성 군주인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녹스가 가톨릭 통치에 맞서기 위해 사용했던 논리가 이제 개신교 군주의 정당성까지 공격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잔은 녹스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면서 더욱 복잡해집니다. 스코틀랜드에서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또 다른 한 명의 여성 군주, 메리 스튜어트였기 때문입니다.

녹스는 여성 군주의 통치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을 곧바로 장로교 정치의 본질이나 후대의 여성안수 반대 논리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녹스에게서 발전한 장로교 정치의 핵심은 여성의 지도력을 배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목사와 장로가 그리스도의 말씀 아래 공동으로 교회를 섬기고 치리한다는 데 있습니다. 여성안수 문제는 이후 교회 직분과 관련된 성경 본문의 해석을 중심으로 별도의 역사적 논쟁을 거쳐 발전했습니다.

 

6. 스코틀랜드로 돌아오다: 교회개혁과 정치권력

 

1559년 녹스는 마침내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습니다. 젊은 시절 박해받는 설교자였고, 이후 망명자가 되어 제네바에서 개혁교회의 모습을 경험했던 녹스는 이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1560년은 결정적인 해였습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종교개혁을 받아들였고, 녹스를 비롯한 개혁자들이 작성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가 채택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이제 개인의 신앙을 넘어 교회의 예배와 가르침, 제도와 질서를 새롭게 하는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말씀과 성례, 교육과 권징, 목회자와 장로를 중심으로 하는 개혁교회의 모습이 스코틀랜드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권력과 교회의 관계를 둘러싼 문제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1561년 가톨릭 신앙을 가진 메리 스튜어트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오면서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개혁교회의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나라를 가톨릭 군주가 통치하게 된 것입니다. 녹스와 메리는 예배와 미사, 군주의 종교적 권한 등을 둘러싸고 여러 차례 충돌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녹스가 여왕에게 저항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군주는 어디까지 교회의 신앙에 관여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군주의 뜻이 충돌한다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다시 등장한 것입니다.

녹스는 정치권력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에드워드 6세 시대에는 정치권력과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스코틀랜드에서도 정치적 후원 없이 종교개혁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군주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으며 그 권위는 절대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녹스의 정치사상을 단순히 '저항사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정치권력은 교회개혁의 동역자가 될 수도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억압할 때에는 저항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녹스가 스코틀랜드에 남긴 더 중요한 유산이 드러납니다. 그의 궁극적인 관심은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를 유일한 머리로 고백하며 말씀에 따라 다스려지는 교회를 세우는 데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회개혁의 방향은 이후 스코틀랜드 장로교 정치가 형성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7. 정리: 존 녹스는 무엇을 남겼는가?

 

존 녹스의 생애를 돌아보면 그를 단순히 '정치권력에 저항한 종교개혁자'라고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정치권력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정치권력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에드워드 6세 시대에는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 참여했으며, 메리 튜더의 가톨릭 복귀와 박해 앞에서는 망명했고 강력한 비판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제네바에서는 개혁교회의 모습을 경험했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뒤에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녹스의 생애를 관통하는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교회도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으며 정치권력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치권력은 복음을 보호하고 교회의 개혁을 도울 수 있지만, 교회의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녹스가 에드워드 6세의 정부와 협력하면서도 메리 튜더와 메리 스튜어트의 종교정책에 맞설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라는 선택 자체가 아니라, 그 권력이 하나님의 말씀과 통치 아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녹스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저항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 개혁교회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바르게 시행되며, 목회자와 장로가 함께 공동체를 돌보는 교회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교회개혁은 이후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 정치가 발전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고, 스코틀랜드는 장로교 전통이 형성되고 발전하는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녹스의 생애를 '저항'이라는 한 단어로 기억할 필요는 없습니다. 박해받는 설교자에서 망명자로, 망명자에서 목회자로, 그리고 마침내 한 나라의 교회개혁을 이끄는 지도자로 살아간 그의 생애가 궁극적으로 향했던 곳은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