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사상]24장: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장로정치체제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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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장: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장로정치체제

 

1. 들어가는 말: 장로교회의 고향 스코틀랜드에는 왜 '장로교회'가 없을까?

 

녹스는 제네바에서 칼뱅의 종교개혁을 경험한 뒤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종교개혁을 이끌었습니다. 1560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종교개혁을 받아들였고,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가 채택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가 개혁교회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장로교 정치가 이때 한꺼번에 완성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16세기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들의 관심은 새로운 교파를 만드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종교개혁 이후 스코틀랜드의 교회를 어떻게 개혁하고 다스릴 것인가였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것은 새로운 교파 하나가 탄생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코틀랜드의 교회가 장로교적 교회정치를 형성해 가는 과정입니다. 존 녹스와 동료 개혁자들은 『제1치리서』를 통해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제시했지만, 그들의 구상이 그대로 실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러 정치적 갈등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개혁은 계속되었고, 녹스 이후 앤드루 멜빌과 같은 인물들이 이를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1578년 『제2치리서』에 이르러 장로교적 교회질서는 더욱 분명한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이 시간에는 존 녹스와 『제1치리서』에서 앤드루 멜빌과 『제2치리서』에 이르기까지, Church of Scotland가 어떻게 장로교적 교회정치를 형성해 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 1560년, 스코틀랜드의 교회를 새롭게 만들다

 

존 녹스가 1559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을 때 이미 스코틀랜드에는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인 귀족들은 ‘회중의 제후들’(Lords of the Congregation)이라는 정치적 세력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은 녹스 한 사람이 시작한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녹스는 이미 형성되고 있던 개혁운동에 합류하여 그것을 신학적으로 이끌고 결집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국제정세도 종교개혁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섭정 메리 오브 기즈는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개혁파 귀족들은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는 개신교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갈등은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정치적 대립과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1560년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 군대가 스코틀랜드에서 철수한 뒤, 스코틀랜드 의회는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고 가톨릭 미사를 금지했으며, 녹스를 비롯한 개혁자들이 작성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였습니다. 스코틀랜드가 개혁교회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기존의 교회를 부정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교회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제 교회는 누가 다스려야 할까요? 기존의 교회조직을 대신하여 어떤 교회를 만들어야 할까요?

신앙고백을 바꾸는 것과 실제 교회를 새롭게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새로운 신앙고백에 합당한 예배와 직분, 교회질서와 목회의 체계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1560년의 종교개혁은 또 하나의 질문을 낳았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달라졌다면, 이제 우리의 교회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이 바로 1560년에 작성된 『제1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였습니다.

 

3. 『제1치리서』: 녹스는 어떤 교회를 꿈꾸었는가?

 

『제1치리서』는 종교개혁 이후 스코틀랜드에 어떤 교회를 세울 것인가에 대한 종합적인 개혁안이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기존 성직체계를 거부했기에 전국의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성례를 시행할 새로운 목회자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직후에는 개혁신앙을 제대로 교육받은 목회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없는 지역에서는 독경자(reader)를 세워 성경과 공적인 기도문을 읽게 하고,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교회를 살피고 가르칠 감독자(superintendent)를 두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아직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장로교 정치가 완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교회의 직분도 새롭게 정비했습니다. 목회자는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시행하며, 장로는 목회자와 함께 교인들의 신앙과 생활을 돌보고 권징을 담당했습니다. 집사는 교회의 재정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습니다. 교회는 한 사람의 성직자가 지배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여러 직분자가 함께 섬기고 돌보는 공동체로 바뀌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녹스와 종교개혁자들의 관심은 교회 내부의 조직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제1치리서』는 각 지역에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교육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도 교회의 중요한 책임으로 보았습니다. 이를 위해 과거 교회가 소유했던 재산을 목회자의 생활뿐 아니라 교육과 빈민구제를 위해 사용하려 했습니다. 따라서 녹스가 생각한 종교개혁은 예배와 교회직제를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복음에 따라 사람을 가르치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며 공동체의 삶을 새롭게 만드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현실적인 문제가 생겼습니다. 종교개혁을 지지했던 귀족들 가운데 상당수는 가톨릭교회가 가지고 있던 토지와 재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데에는 종교개혁자들과 이해관계가 일치했지만, 그 재산을 목회와 교육, 빈민구제를 위해 사용하는 문제에서는 이해관계가 달랐습니다. 결국 『제1치리서』가 제시했던 개혁안 전체가 그대로 실현되지는 못했습니다.

 

4. 장로교 정치의 형성: 교회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신앙고백과 개혁의 원칙뿐 아니라 실제로 전국의 교회를 운영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했습니다. 1560년 12월에는 스코틀랜드 교회의 첫 번째 총회(General Assembly)가 열렸습니다. 개별 교회들이 서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 교회의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구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교회제도는 오늘날의 장로교 정치와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종교개혁 직후에는 목회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넓은 지역의 교회를 살피는 감독자(superintendent)가 필요했고, 기존 주교제도의 흔적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초기 스코틀랜드 교회는 처음부터 완성된 장로교 정치체제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필요에 대응하면서 새로운 교회질서를 만들어 갔습니다.

정치적인 갈등도 계속되었습니다. 군주와 귀족들은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1570년대에는 주교라는 직분이 다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국가와 군주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교회 자체의 질서를 가지고 스스로 다스려져야 하는가? 한 명의 주교가 교회를 다스려야 하는가, 아니면 목회자와 장로들이 회의를 통해 공동으로 다스려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중요해졌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점차 목회자와 장로의 공동 치리와 교회회의를 중심으로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녹스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이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녹스는 1572년에 세상을 떠났고, 스코틀랜드 교회는 여전히 감독제와 장로교적 질서 사이에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녹스 이후 이러한 개혁을 이어간 대표적인 인물이 앤드루 멜빌(Andrew Melville)입니다.

 

5. 앤드루 멜빌: 녹스 이후의 종교개혁

 

존 녹스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기초를 놓았다면, 그 이후 장로교적 교회정치를 보다 분명하게 발전시킨 인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이 앤드루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입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에서 공부한 뒤 제네바에서 활동하면서 개혁교회의 신학과 교회질서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멜빌 역시 녹스와 마찬가지로 제네바 종교개혁의 영향을 스코틀랜드로 가져온 인물이었습니다.

멜빌이 1574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을 때 녹스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멜빌은 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감독제보다 목회자와 장로들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 치리를 지지했습니다. 그에게 목회자들은 본질적으로 동등했으며, 특정한 한 사람이 다른 목회자들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지배가 아니라 공동의 치리, 이것이 장로교 정치의 중요한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멜빌에게 더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의 머리가 누구인가였습니다. 왕이 주교를 임명하고 그들을 통해 교회를 통제한다면 교회정치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관한 문제가 됩니다. 훗날 제임스 6세와 충돌하면서 멜빌은 스코틀랜드에는 두 왕과 두 왕국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는 제임스와 스코틀랜드 왕국이고, 다른 하나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입니다. 왕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으며,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녹스와 멜빌 사이에는 연속성과 발전이 있습니다. 녹스가 스코틀랜드에 개혁교회의 기초를 놓았다면, 멜빌은 그 위에서 그 교회를 누가, 어떤 방식으로 다스릴 것인가를 더욱 분명하게 만들었습니다.

 

6. 『제2치리서』: 장로교 정치가 모습을 갖추다

 

멜빌과 동료 개혁자들의 교회정치에 대한 생각은 1578년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가 받아들인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에 보다 체계적으로 나타납니다. 『제1치리서』가 작성된 지 약 18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제1치리서』의 질문이 주로 “종교개혁 이후 어떤 교회를 세울 것인가?”였다면, 『제2치리서』에서는 “그 교회를 누가,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라는 문제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먼저 『제2치리서』는 교회와 국가의 권한을 구별했습니다. 국가와 교회는 모두 하나님 아래 있지만 서로 다른 일을 맡고 있습니다. 국가의 통치자는 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지만, 그렇다고 군주가 교회의 머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고유한 직분과 권한이 있으며, 말씀의 선포와 성례, 권징과 직분에 관한 일은 교회가 담당해야 합니다. 이것은 당시 왕이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스코틀랜드의 현실에서 매우 중요한 원칙이었습니다.

둘째, 『제2치리서』는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과 질서를 보다 분명하게 정리했습니다. 목회자는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시행하며, 장로는 목회자와 함께 교인들의 신앙과 생활을 살피고 교회를 치리합니다. 집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교회의 재정을 섬깁니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한 사람이 다른 목회자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와 장로들이 함께 교회를 돌보고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셋째, 이러한 공동의 치리는 개별 교회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한 교회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여러 교회가 함께 모여 논의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개별 교회의 치리회에서 더 넓은 지역의 회의와 전체 교회의 총회로 이어지는 회의의 질서가 발전했습니다. 교회의 권위가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직분자와 여러 교회의 회의를 통해 행사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장로교 정치에서 ‘장로’만큼 중요한 것이 ‘회의’입니다. 장로교 정치란 단순히 교회에 장로라는 직분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목회자와 장로들이 함께 교회를 돌보고, 여러 교회가 서로 연결되어 중요한 문제를 공동으로 결정하는 교회정치입니다. 감독제에서 한 사람의 주교가 넓은 지역의 교회를 감독한다면, 장로교 정치에서는 교회회의가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제2치리서』의 중요성이 분명해집니다. 『제1치리서』가 종교개혁 이후 새로운 교회의 청사진을 제시했다면, 『제2치리서』는 약 20년에 걸친 경험과 갈등을 거치면서 그 교회를 누가, 어떤 원리에 따라 다스릴 것인가를 보다 분명하게 정리한 문서였습니다.

 

7. 정리: Church of Scotland는 어떻게 Presbyterian이 되었는가?

 

오늘 강의를 시작하면서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장로교회의 고향이 스코틀랜드라면 왜 그 교회의 이름은 'Presbyterian Church of Scotland'가 아니라 'Church of Scotland'일까요?” 이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들은 처음부터 '장로교회'라는 새로운 교파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관심은 종교개혁 이후 스코틀랜드의 교회를 어떻게 개혁하고 다스릴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장로교적 교회정치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한 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녹스 → 『제1치리서』 → 시행착오와 갈등 → 멜빌 → 『제2치리서』 → 장로교적 교회정치의 형성

 

이 과정에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교회의 머리는 누구인가?”, “교회는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 “국가는 교회에 어디까지 관여할 수 있는가?”를 계속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고백하면서 목회자와 장로가 함께 교회를 다스리고, 여러 교회가 회의를 통해 서로 연결되는 질서를 만들어 갔습니다. 그러므로 장로교(Presbyterian)이라는 말은 처음부터 새로운 교파의 이름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Church of Scotland가 종교개혁 과정에서 형성해 간 교회정치의 방식을 가리켰습니다. 오늘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당회와 노회, 총회 역시 이러한 역사적 전통 위에 있습니다. 우리가 물려받은 장로교 정치는 단순한 행정제도가 아니라, 수많은 갈등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형성된 종교개혁의 역사적 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