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사상]25강: 장로교 신학이 말하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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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강: 장로교 신학이 말하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

 

1. 서론적 질문: 교회와 국가는 원래 분리되어 있었는가?

 

오늘날 우리는 흔히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너무 익숙한 표현이기 때문에 교회와 국가는 본래 서로 다른 영역에 있었고,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오래된 원칙이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초대교회의 공의회입니다. 325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1차 보편공의회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소집으로 열렸습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칼케돈 등에서 열린 초기 보편공의회들의 개최 과정에도 황제들이 깊이 관여했습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했다면, 황제가 교회의 신앙을 결정한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황제는 공의회를 소집하고 회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정치적·행정적 조건을 제공했으며, 그 결정의 시행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의 관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같은 신학적 문제를 논의하고 신조와 교리적 결정을 형성한 것은 공의회에 참석한 교회의 감독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구별이 하나 생깁니다. 교회와 국가가 서로 관계한다는 것과 교회와 국가가 동일한 권한을 가진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중세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중세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교황과 황제는 서로 완전히 분리된 두 세계의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의 그리스도교 세계 안에서 서로 다른 권위를 행사했습니다. 대표적인 갈등이 11-12세기의 “서임권 투쟁(Investiture Controversy)”입니다. 주교를 누가 임명하고 그 직위를 부여할 수 있는가를 둘러싸고 교황과 황제가 충돌했습니다.

그 배후에는 오래된 질문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일은 누가 결정하는가?

국가의 일은 누가 결정하는가? 한쪽의 권한은 다른 쪽의 영역에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가? 따라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이해할 때 가장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관계”와 “권한”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와 국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협력하고 충돌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문제는 둘 사이에 관계가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아니라, 그 관계 속에서 누구에게 어떤 권한이 있는가였습니다.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은 바로 이 오래된 질문을 새로운 상황에서 다시 제기했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면, 국가의 통치자는 교회에 어디까지 관여할 수 있는가?

2. 종교개혁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교회와 국가가 갑자기 서로 분리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개혁은 처음부터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에는 독일의 제후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와 시의회의 협력 속에서 종교개혁이 진행되었습니다. 제네바에서도 교회와 시정부는 긴밀하게 관계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역시 설교자들만의 운동이 아니라 귀족과 의회가 함께 참여한 정치적ᄋ종교적 변화였습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을 단순히 교회가 국가로부터 독립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종교개혁에는 하나의 역설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정치권력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개혁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정치권력이 교회를 어디까지 다스릴 수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지역마다 달랐습니다. 독일에서는 제후들이 종교개혁을 보호하고 교회의 질서 형성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취리히와 제네바에서는 도시정부와 교회가 긴밀한 관계 속에서 개혁을 진행했습니다. 잉글랜드에서는 로마 교황의 관할권으로부터 벗어난 교회가 왕권과 긴밀하게 결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반면 스코틀랜드에서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질문이 중요해졌습니다. 왕은 국가를 다스리는 것처럼 교회도 다스릴 수 있는가? 따라서 종교개혁은 교회와 국가를 하나의 방식으로 분리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교회와 국가의 권한 관계를 여러 방식으로 다시 구성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장로교 전통에서 특히 중요해진 것이 스코틀랜드의 질문이었습니다.

 

3. 스코틀랜드: 왕도 교회의 머리가 아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중요한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로마 교황의 권위로부터 벗어난 교회를 이제 누가 다스릴 것인가? 스코틀랜드 개혁자들도 처음부터 국가와 교회를 완전히 분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국왕과 의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시민정부였으며,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교회를 보호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국가가 교회와 관계를 맺어도 되는가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다시 권한이었습니다. 국왕의 권한은 교회 안에서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가?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목사와 장로가 세워지고, 교회회의가 만들어지고, 총회가 정기적으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국왕은 이러한 교회회의를 통제할 수 있을까요?

국왕이 총회의 소집과 해산을 결정하고, 목회자의 임명과 교회의 치리를 통제하며, 교회의 결정을 승인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면 교회의 실질적인 통치자는 누구일까요? 1578년 스코틀랜드 총회가 받아들인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는 이 문제에 중요한 신학적 답을 제시했습니다.

『제2치리서』는 교회의 권세와 시민정부의 권세를 “서로 다르고 구별되는 것"(different and distinct)”으로 설명합니다. 두 권세는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오지만 서로 다른 권세입니다. 교회의 권세는 국왕이나 의회가 교회에 부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정치의 출발점은 단순히 “왕에게 저항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먼저 하나의 신학적 고백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이 고백에서 교회의 고유한 권한이 나옵니다.

국가에는 시민사회를 다스릴 권한이 있습니다. 법과 질서를 세우고 정의를 시행하며 공동체의 평화를 보호합니다. 교회에도 고유한 권한이 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시행하며, 직분자를 세우고 권징을 시행하며, 교회회의를 통하여 교회의 일을 판단합니다. 전통적인 표현을 사용하면 국가에는 “칼의 권세(power of the sword)”가 있고 교회에는 “열쇠의 권세(power of the keys)”가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왕이 아니며, 왕도 목사가 아닙니다. 교회가 국가의 권한을 대신 행사할 수 없는 것처럼 국가도 교회의 권한을 대신 행사할 수 없습니다. 이 원리를 인상적으로 표현한 사람이 앤드루 멜빌(Andrew Melville)이었습니다.

1596년 제임스 6세와 대면한 자리에서 멜빌은 스코틀랜드에는 “두 왕과 두 왕국"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하나는 제임스 왕과 스코틀랜드 왕국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입니다. 그 의미는 분명했습니다. 왕에게도 왕이 있습니다. 국왕은 스코틀랜드 왕국에서는 통치자이지만 교회의 머리는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는 국왕 역시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입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주장한 것은 오늘날의 의미에서 교회와 국가가 아무 관계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은 보다 구체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권한을 국가가 대신 행사할 수 없다. 이것이 스코틀랜드 장로교 전통이 말한 교회의 자유였습니다.

 

4. 잉글랜드: 국왕은 교회의 최고 통치자인가?

 

같은 종교개혁 시대에 잉글랜드에서는 다른 방향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534년 영국 의회가 통과시킨 수장령(Act of Supremacy)은 헨리 8세를 잉글랜드 교회의 지상에서의 “유일한 최고 수장(the only supreme head in earth of the Church of England)”으로 규정했습니다. 이 조치는 로마 교황의 관할권을 단절하고 잉글랜드 교회에 대한 최고권을 왕권에 결합시켰습니다. 물론 이것이 국왕이 사제가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잉글랜드 교회에는 여전히 주교와 성직자들이 있었고 기존의 교구제도도 유지되었습니다. 문제는 다시 관할권이었습니다. 잉글랜드 교회에 대한 최종적인 지상 관할권은 어디에 있는가? 1534년의 답은 분명했습니다. 로마가 아니라 잉글랜드 왕권에 있다. 이후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인 1559년의 새로운 수장령에서는 군주를 교회의 Supreme Head가 아니라 'Supreme Governor', 곧 최고 통치자로 규정했습니다.

이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함께 놓아보면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두 나라 모두 로마 교황의 관할권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질문에는 서로 다른 답을 내놓았습니다. 교황의 관할권이 사라진 자리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 잉글랜드에서는 왕권과 의회가 교회의 제도적 질서와 긴밀하게 결합된 국교회 체제가 형성되었습니다. 반면 스코틀랜드 장로교 전통에서는 국왕에게도 침범할 수 없는 교회의 고유한 치리권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두 전통의 차이를 단순히 ‘정교일치’와 ‘정교분리’로 나누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두 경우 모두 교회와 국가는 밀접하게 관계했습니다. 차이는 그 관계 속에서 누구에게 어떤 권한을 인정할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서양을 건너가면 이 질문은 다시 달라집니다. 국가는 교회뿐 아니라 인간의 신앙과 양심까지 다스릴 수 있는가?

 

5. 신대륙: 국가는 신앙과 양심을 다스릴 수 있는가?

 

이 질문을 가장 분명하게 제기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c. 1603-1683)였습니다. 윌리엄스는 영국에서 성장한 청교도 목회자였습니다. 1631년 매사추세츠에 도착한 이후 식민지의 교회와 시민정부의 관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고, 결국 1635년 매사추세츠 당국으로부터 추방되었습니다. 윌리엄스가 문제 삼았던 것은 단순히 어떤 교파가 국가의 보호를 받을 것인가가 아니었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시민정부의 관할권(civil jurisdiction)”이었습니다.

시민정부는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사회질서와 정의를 유지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사람이 무엇을 믿을 것인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 것인지까지 국가가 결정할 수 있을까요? 윌리엄스의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국가의 권한이 아니다. 1644년 출판한 『The Bloudy Tenent of Persecution, for Cause of Conscience』에서 그는 종교적 양심을 이유로 한 국가의 강제를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다른 개신교인뿐 아니라 가톨릭교도와 유대인, 무슬림처럼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양심 역시 시민정부의 강제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스코틀랜드와 윌리엄스의 질문을 비교해 보면 중요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국왕이 교회의 고유한 치리권을 침범할 수 있는가? 윌리엄스의 질문은 한 걸음 다른 곳으로 이동합니다. 시민정부는 인간의 종교적 양심에 대한 관할권 자체를 가지고 있는가? 스코틀랜드에서는 교회라는 공동체의 자유가 중요했다면, 윌리엄스에게서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보다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따라서 윌리엄스를 스코틀랜드 장로교 정치신학의 자연스러운 발전 결과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 나온 서로 다른 대답입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하나의 질문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권한은 어디까지인가?

윌리엄스는 교회의 정원과 세상의 광야 사이에 있는 “울타리 또는 분리의 벽(hedge or wall of separation)”이라는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것은 종교를 사회에서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히려 신앙의 순수성과 양심의 자유를 국가의 강제로부터 보호하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국가의 권한에는 경계가 있다. 인간의 양심은 국가가 강제로 지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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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가는 말: 권한에는 경계가 있다

 

우리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흔히 “정교분리”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국가와 교회가 아무 관계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종교개혁은 정치권력의 보호와 협력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의 질문은 계속해서 제기되었습니다. 국가의 권한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교회의 자유를 물었습니다. 국왕은 국가의 통치자이지만 교회의 머리는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며, 따라서 교회의 고유한 권한을 국가가 대신 행사할 수 없습니다.

잉글랜드에서는 다른 답을 만들었습니다. 로마 교황의 관할권을 거부하면서 왕권과 교회가 긴밀하게 결합된 국교회 체제를 형성했습니다. 그리고 로저 윌리엄스는 질문을 다시 바꾸었습니다. 국가는 인간의 신앙과 양심까지 다스릴 수 있는가? 서로 다른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하나의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권력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가? 장로교와 개혁교회 전통에서 이 질문의 신학적 출발점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국가의 권력도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교회의 권력도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교회가 국가보다 높은가, 국가가 교회보다 높은가가 아닙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무엇을 맡기셨는가? 국가에는 국가의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교회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은 자신에게 모든 권한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권한에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권한에는 경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아무 관계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관계하면서도, 어떻게 서로에게 맡겨지지 않은 권한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을 것인가? 장로교 정치신학이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남긴 중요한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