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사상]26강: 영국 종교개혁의 특수성: 영국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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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강 영국 종교개혁의 특수성: 영국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

 

1. “신앙의 수호자” 헨리 8세

 

영국 종교개혁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헨리 8세입니다. 그는 아들을 얻기 위해 여섯 번 왕비를 바꾼 왕,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과 이혼하려 했던 왕, 결국 로마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고 영국국교회를 만든 왕입니다. 영화 “천일의 앤”이나 “튜더스” 같은 드라마도 헨리 8세의 이러한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종교개혁은 때때로 한 왕의 결혼과 욕망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처럼 설명되기도 합니다.

영국 종교개혁이 왜 다른 지역의 종교개혁과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만나야 할 헨리 8세의 모습은 “신앙의 수호자”입니다. 1521년 헨리 8세의 이름으로 『일곱 성사의 옹호』가 출판되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루터가 비판했던 가톨릭교회의 일곱 성사를 옹호하는 책이었습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헨리에게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이 칭호는 적어도 1520년대 초의 헨리 8세가 자신을 어떤 왕으로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종교개혁자가 아니라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는 기독교 군주였습니다.

헨리 8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도성』에 주석을 붙인 유럽의 대표적인 인문주의자와 서신을 주고받고, 루터의 신학을 직접 논박하며,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았던 왕이었습니다. 스페인의 인문주의자 후안 루이스 비베스(Juan Luis Vives)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도성』에 주석을 붙이고, 이 주석을 헨리 8세에게 헌정했으며, 헨리는 비베스에게 직접 답신을 보냈습니다. 그 답신은 훗날 1610년에 출판된 『신의 도성』 최초의 완전한 영어 번역본에도 수록되었습니다.

신앙의 수호자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영국 종교개혁의 가장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신앙의 수호자'였던 헨리 8세는 어떻게 불과 십여 년 뒤 로마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고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수장이 되었을까요? 헨리 8세가 갑자기 신앙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너무 단순합니다. 반대로 헨리 8세가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가 되었다고 설명해도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헨리에게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정체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앙의 수호자인 동시에 튜더 왕조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두 정체성이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충돌 속에서 영국 종교개혁은 다른 지역의 종교개혁과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2. 신앙의 수호자와 튜더왕조의 두 번째 왕

 

헨리 8세는 신앙의 수호자인 동시에 튜더 왕조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튜더 왕조는 오랜 역사를 가진 안정된 왕조가 아니었습니다. 헨리 8세의 아버지 헨리 7세가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물리치고 왕위에 오르면서 시작된 새로운 왕조였습니다. 장미전쟁으로 오랫동안 왕위를 둘러싼 갈등을 경험했던 새로운 왕조에게 안정적인 계승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헨리 8세에게도 왕위를 이어갈 후계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1509년 왕위에 오른 뒤 형 아서의 미망인이었던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여러 차례 임신과 출산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자녀가 유산되거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1516년에 태어난 메리였습니다. 헨리에게는 왕위를 안정적으로 계승할 적법한 아들이 없었습니다. 훗날 메리와 엘리자베스가 차례로 잉글랜드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헨리에게는 아직 그런 미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잉글랜드에는 여성이 자신의 권리로 안정적으로 왕위를 계승한 분명한 선례가 없었고, 장미전쟁의 기억도 아직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헨리에게 남성 후계자의 부재는 튜더 왕조의 미래와 연결된 정치적인 문제였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헨리의 두 정체성이 서로 긴장하기 시작합니다. 신앙의 수호자로서 헨리는 교회의 가르침과 질서 안에 있는 기독교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튜더의 왕으로서 그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왕조가 안정적으로 계속되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캐서린과의 결혼생활이 계속될수록 새로운 남성 후계자가 태어날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졌습니다. 헨리는 자신의 결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캐서린은 원래 형 아서의 아내였습니다. 헨리는 레위기의 말씀을 근거로 자신의 혼인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은 아닌지 의심했습니다. 반면 교회는 이미 캐서린과의 혼인을 위해 교황의 관면을 허락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단순히 헨리 개인이 결혼을 끝내고 싶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앤 불린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헨리 8세가 원했던 것은 캐서린과의 이혼이었을까요, 아니면 앤 불린과의 새로운 결혼이었을까요?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강조점이 다릅니다. 헨리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한 아내를 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캐서린과의 혼인이 처음부터 유효하지 않았다는 판단을 받고, 새로운 적법한 혼인을 통해 튜더 왕위를 이어갈 후계자를 얻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캐서린과의 혼인 문제와 앤 불린과의 결혼 문제는 왕위계승의 문제와 서로 얽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헨리보다 더 높은 교회적 권위의 판단이 필요했습니다. 교황이었습니다. 이제 한 왕의 결혼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질문으로 넘어가기 시작합니다. 잉글랜드 왕의 혼인을 최종적으로 판단할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처음에는 후계자의 문제였습니다. 다음에는 결혼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교황의 권한과 잉글랜드 왕의 권한이 어디까지인가를 묻는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3. 왕의 결혼은 왜 교황권의 문제가 되었는가?

 

헨리 8세가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로 하고 새로운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교황의 판단이 필요했습니다. 문제는 이 일이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캐서린과 헨리의 결혼 자체가 이미 교황의 허락을 받아 이루어진 결혼이었기 때문입니다. 헨리가 이제 그 결혼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이전 교황이 허락했던 혼인의 정당성을 다시 판단해야 하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캐서린은 자신의 결혼이 잘못되었다는 헨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는 캐서린과 헨리의 형 아서 사이의 첫 번째 혼인이 실제로 완성된 혼인이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캐서린은 아서와의 혼인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자신과 헨리의 결혼이 정당한 혼인이라고 끝까지 확신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단순히 헨리가 원하고 교황이 허락하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유럽의 국제정치가 개입했습니다. 캐서린의 조카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였습니다. 특히 1527년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약탈한 뒤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의 이모인 캐서린과 헨리의 혼인을 무효라고 선언하는 것은 교황에게도 큰 부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헨리의 혼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유를 단순히 "교황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설명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교회법의 문제와 캐서린의 저항, 그리고 교황과 황제를 둘러싼 유럽의 정치적 관계가 서로 얽혀 있었습니다. 헨리는 처음부터 로마와 결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오히려 로마의 제도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해결책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헨리의 측근이었던 토머스 울지는 교황으로부터 혼인 문제에 대한 유리한 결정을 얻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1529년에는 잉글랜드에서 교황의 권한을 위임받은 법정까지 열렸지만, 결국 헨리가 원하는 결론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처음 헨리가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캐서린과의 혼인은 유효한가?” 그런데 해결이 계속 지연되면서 질문 자체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왜 잉글랜드 왕의 혼인을 로마의 교황이 최종적으로 판단해야 하는가?” 이 질문의 변화가 중요합니다. 문제의 중심이 혼인의 유효성에서 관할권의 정당성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토머스 울지는 실각하고, 헨리 주변에는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토머스 크롬웰과 토머스 크랜머입니다. 이들은 헨리가 원하는 혼인 문제의 해결을 단순히 교황에게 다시 요청하는 방식이 아니라, 잉글랜드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했습니다.

그 결과 1530년대 초 잉글랜드에서는 일련의 법률과 제도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가운데 결정적인 법률이 1533년의 “상소금지법(Act in Restraint of Appeals)”이었습니다. 이 법은 잉글랜드를 외부의 권위에 종속된 영역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통치권을 가진 정치공동체로 규정하는 논리를 제시했습니다. 이제 잉글랜드의 교회적 사건을 로마에 상소하여 최종 판단을 받는 길이 차단되었습니다.

이것은 헨리의 결혼 문제에도 결정적인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제 캐서린과의 혼인 문제를 로마가 아니라 잉글랜드 안에서 판단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해 토머스 크랜머는 캔터베리 대주교로서 헨리와 캐서린의 혼인이 무효라고 선언했고, 헨리와 앤 불린의 혼인은 적법한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왕의 결혼 문제를 잉글랜드 안에서 해결하려면 결국 더 근본적인 질문에 답해야 했습니다. 잉글랜드 교회에 대한 최종적인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1534년 수장령(Act of Supremacy)은 그 질문에 헨리의 방식으로 대답했습니다. 잉글랜드 의회는 헨리 8세를 잉글랜드 교회의 지상에서의 “유일한 최고 수장(only supreme head in earth of the Church of England)”으로 선언했습니다. 이제 문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한 왕이 아들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결혼을 원했습니다. 그 결혼을 위해 기존 혼인의 무효 선언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 판단권은 교황에게 있었습니다. 결국 헨리는 그 판단권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했습니다.

후계자의 문제가 결혼의 문제가 되었고, 결혼의 문제가 관할권의 문제가 되었으며, 관할권의 문제는 마침내 교회와 왕권의 관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문제가 남습니다. 헨리가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고 자신을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 선언했다면, 헨리는 이제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가 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헨리 8세는 교황에게서 떠났지만, 루터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영국 종교개혁의 또 하나의 특수성이었습니다.

 

4. 교황에게서 떠났지만 루터에게 가지 않았다

 

1534년 수장령으로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의 관할권에서 벗어나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수장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헨리 8세가 이제 가톨릭 신앙을 버리고 종교개혁자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헨리에게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과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신앙을 거부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영국 종교개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면죄부 문제에서 시작했지만 곧 구원론과 교회론의 근본적인 문제로 나아갔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론, 성경의 권위, 성례의 문제를 둘러싸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충돌했습니다. 그러나 헨리 8세가 로마와 결별한 직접적인 문제는 이와 달랐습니다. 헨리가 가장 먼저 거부한 것은 가톨릭교회의 신앙 전체가 아니라 잉글랜드 교회에 대한 교황의 관할권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와 결별한 뒤에도 헨리는 자신이 오랫동안 지켜왔던 신앙의 상당 부분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물론 잉글랜드 교회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수도원들이 해산되었고, 수도원의 재산은 왕실에 귀속되거나 새로운 소유자들에게 넘어갔습니다. 성경을 영어로 읽을 수 있는 길도 열렸습니다. 토머스 크랜머와 토머스 크롬웰을 비롯하여 종교개혁에 우호적인 인물들의 영향력도 커졌습니다. 따라서 로마와의 결별이 단순히 교황을 왕으로 바꾸어 놓았을 뿐 아무런 종교적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헨리 자신은 루터파 신앙으로 이동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1539년의 6개조 신조(Six Articles)입니다. 이 법은 화체설을 비롯하여 전통적인 가톨릭교회의 여러 교리와 관행을 강하게 옹호했습니다. 종교개혁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매우 위협적인 법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독특한 헨리 8세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로마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은 왕의 수장권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을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종교개혁 신학을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사람 역시 전통적인 신앙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처벌받을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토머스 모어입니다. 헨리와 가까운 인문주의자였던 모어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반대했던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교회의 최고 수장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1535년 처형되었습니다.

반대편에는 개신교적인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헨리가 허용한 개혁의 범위를 넘어설 경우 박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얼핏 보면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헨리의 입장에서 보면 나름의 일관성이 있었습니다. 교황은 잉글랜드 교회를 다스릴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루터가 옳은 것도 아니다. 헨리가 원했던 것은 로마의 교황에게 종속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는 잉글랜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을 이해할 때는 교회의 제도적 변화와 신학적 변화를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잉글랜드 교회는 제도적으로는 로마와 결별했했지만, 신학적으로는 하루아침에 개신교회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헨리 8세는 교황에게서 떠났지만 루터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영국 종교개혁의 중요한 특수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헨리 8세의 죽음으로 영국 종교개혁이 끝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에드워드 6세 시대에는 개신교적 개혁이 본격화되었고, 메리 1세는 다시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관계를 회복했으며, 엘리자베스 1세 시대는 다시 새로운 종교적 질서가 형성되었습니다.

 

5. 나가는 말: 헨리 8세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신앙의 수호자”였던 헨리 8세는 왜 로마 교황과 결별한 왕이 되었을까요? 그는 가톨릭 신앙을 버리고 루터의 종교개혁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로마와 결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의 수호자이면서 동시에 튜더 왕조의 왕이었던 헨리에게 왕위계승의 문제가 생겼고, 그것은 결혼의 문제를 거쳐 마침내 잉글랜드 교회에 대한 최종적인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문제로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헨리 8세가 남긴 잉글랜드 교회는 독특했습니다. 로마와는 결별했지만 아직 개신교적 신학의 정체성이 완전히 확립되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영국 종교개혁의 시작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헨리 8세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튜더 왕조를 이어갈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에드워드라는 아들을 얻었지만, 에드워드와 메리, 엘리자베스 모두 후손을 남기지 못했고 튜더 왕조는 헨리의 자녀 세대에서 끝났습니다. 헨리 8세가 낳기를 원했던 것은 왕위를 이을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역사 속에서 남긴 것은 왕이 교회의 최고 수장이 된 잉글랜드 교회였습니다. 그가 지키려고 했던 튜더 왕조는 사라졌지만, 그 과정에서 로마로부터 독립한 잉글랜드 교회는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