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사상]12강: 루터의 성례론

관리자
조회수 122


12강: 루터의 성례론

 

1. 들어가는 말: 왜 루터는 성례를 문제삼았을까요?

 종교개혁은 다양한 관점에서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변화 가운데 하나는 성례입니다. 중세교회는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종부성사, 혼인성사, 성품성사 등 7성사를 중심으로 신자의 삶 전체를 조직하였습니다. 중세 기독교 세계관에서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 직전까지 성례를 통해 교회 질서 안으로 들어가고 유지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례는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교회와 구원 구조 전체를 떠받치는 중심축이었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는 대조적으로, 루터는 가톨릭의 7성사 가운데 세례와 성만찬 만을 성례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성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성례의 수가 지나치게 확대되면서, 복음의 약속보다 교회의 제도와 인간의 행위가 더 중심이 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이 참된 성례인가?”를 다시 묻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성례의 기준을 세 가지로 보았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둘째는 눈에 보이는 표지와 함께 복음의 약속이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셋째는 죄사함의 약속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루터는 세례와 성만찬을 중심적인 성례로 보았고, 결국 종교개혁 전통 안에서는 세례와 성만찬 두 가지가 중심 성례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 문제는 당시 매우 치열한 논쟁이었습니다. 1521년 영국의 왕 헨리 8세는 『7성사 옹호』(Assertio Septem Sacramentorum)라는 글을 써서, 루터의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비판하였습니다. 헨리 8세는 7성사와 교황권을 강하게 옹호하였고, 교황 레오 10세는 그에게 “신앙의 수호자(Defender of the Faith)”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이에 대해 루터는 강하게 반박하였습니다. 루터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성례의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례가 정말 복음의 약속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성례는 교회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다가오시는 복음의 사건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루터에게 성례란 무엇인가

  루터의 성례론은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교회에는 두 성례만 있다. 세례와 성찬이다. 왜냐하면 이 둘 안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표지와 죄 사함의 약속을 함께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루터가 성례의 기준을 어디에 두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성례는 단순히 오래된 교회 예식이 아닙니다. 성례는 그리스도의 제정, 외적 표지, 죄 사함의 약속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루터가 성례를 단순히 인간의 신앙 표현으로 축소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루터는 성례를 하나님께서 실제로 일하시는 객관적인 사건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인간의 감정이나 경건 상태는 끊임없이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례의 의미가 인간의 믿음의 강도나 종교적 열심에 달려 있다면, 구원의 확신은 다시 인간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루터는 확신의 근거를 인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 두고자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루터가 중세교회의 성례 이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중세교회 역시 성례의 객관성을 강조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객관성은 점점 교회의 제도와 사제의 권위, 그리고 성례 자체의 자동적 효력과 강하게 결합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루터는 바로 이 지점을 문제로 보았습니다. 그는 성례의 객관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 객관성의 근거를 다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으로 옮기고자 하였습니다. 따라서 루터에게 성례는 교회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복음의 사건이었습니다. 성례는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행위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오시는 자리였습니다.

  또한 루터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믿음은 성례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성례 안에서 주신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루터에게 성례의 기초는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고, 믿음은 그 약속을 붙드는 응답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루터의 성례론은 두 방향을 동시에 거부하였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성례를 자동적으로 효력을 발생시키는 마술적 장치처럼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성례를 단순한 상징이나 인간의 결단 표현으로 축소하는 것도 거부하였습니다. 루터는 성례 안에서 하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시고, 실제로 약속하시며, 실제로 죄인을 붙드신다고 믿었습니다. 다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교회의 제도나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약속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3. 세례: 구원의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루터에게 성례는 교회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복음의 사건이었습니다. 성례는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행위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오시는 자리였습니다. 또한 루터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믿음은 성례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성례 안에서 주신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루터에게 성례의 기초는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고, 믿음은 그 약속을 붙드는 응답이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특히 루터의 세례 이해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루터는 세례를 단순히 신앙생활의 시작점에 위치한 과거의 의식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례를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붙드는 중심 사건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것은 세례를 단순한 초기 은혜의 단계로 축소시키는 전통에 대한 강한 반발이기도 하였습니다. 루터에게 세례는 과거와 현재를 나누는 경계선이 아니라, 죄와 은혜, 육체와 성령, 마귀와 하나님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현재적 실존 전체를 관통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루터는 세례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를 위해 행하신 구원의 사건에 참여하게 하는 표징과 약속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는 세례의 약속이 인간의 “온 삶과 몸과 영혼을 삼켜서 마지막 날에 영광과 불멸의 옷을 입혀 다시 내어줄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땅 위에 세례보다 더 큰 위로는 없다”고까지 선언하였습니다. 루터에게 세례는 단지 교회에 입문하는 의식이 아니라, 죄인을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약속 자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의 신앙과 삶 전체는 세례의 의미를 붙드는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세례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죄를 용서하셨다는 평생의 확신을 발견하였고, 동시에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살아야 한다는 매일의 동기를 발견하였습니다.

  따라서 루터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계속해서 세례로 돌아가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일의 세례에 지나지 않는다. 세례는 이전에 시작되었지만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우리는 끊임없이 항상 세례를 유지하여, 옛 아담에게 속한 것은 무엇이든 끊어내야 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루터에게 세례는 단지 처음 그리스도인이 될 때, 곧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붙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사역을 가리키기 때문에, 신자는 계속해서 그 약속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점에서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형성하는 믿음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성만찬: 루터는 왜 실제 임재를 붙들었는가

  종교개혁 시대에는 성만찬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특히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의 논쟁은 매우 유명합니다. 두 사람 모두 중세교회의 성례를 비판하였고, 교황 중심의 구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만찬 문제에서는 끝내 일치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성찬의 방식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어떻게 자신을 주시는가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츠빙글리는 성만찬을 주로 기념과 상징의 관점에서 이해하였습니다. 그는 “이는 내 몸이다”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기보다 “이는 내 몸을 의미한다”는 상징적 표현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고 공동체의 믿음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츠빙글리에게 중요한 것은 신자의 믿음과 기억, 그리고 공동체적 고백이었습니다.

  반면 루터는 성만찬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자신을 주신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루터는 예수님의 말씀, “이는 내 몸이다”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철학적 설명이나 논리보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 자체를 붙들고자 하였습니다. 루터에게 성만찬은 단순히 인간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실제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루터가 중세교회의 화체설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중세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개념을 사용하여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러한 철학적 설명 자체를 성경의 중심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빵과 포도주가 완전히 다른 물질로 변한다고 설명하기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말씀에 따라 실제로 성만찬 가운데 임재하신다고 보았습니다.

  동시에 루터는 성만찬을 단순한 상징으로 축소하는 것도 거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성만찬은 결국 인간의 기억과 결단 중심으로 이해될 위험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구원의 확신을 인간의 내면 상태에 두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루터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이 얼마나 뜨겁게 기억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실제로 무엇을 약속하셨는가였습니다.

  따라서 루터에게 성만찬은 복음의 객관적 사건이었습니다. 성만찬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죄인에게 내려오신다는 사실입니다. 루터는 성만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자신을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여기서 “실제”라는 말은 단순히 물질적 변화를 설명하는 철학적 용어라기보다, 그리스도의 약속이 참되다는 의미에 가까웠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주시는가? 정말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여기 오시는가? 루터는 성만찬에서 그 질문에 대한 분명한 실례를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는 성만찬 문제에서 쉽게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성만찬은 단순한 의식이나 상징이 아니라, 복음의 실제성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만찬이 단순한 기억 행위로 축소된다면, 복음 역시 인간의 내면적 결단이나 기억 속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다고 루터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만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자신을 내어주신다는 사실을 끝까지 붙들고자 하였습니다.

 

5. 루터 성례론의 핵심 구조와 의미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루터 성례론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말씀 중심입니다. 루터는 성례를 말씀과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없는 성례는 참된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둘째, 약속 중심입니다. 루터는 인간의 행위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성례는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보여주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약속하시는 자리입니다. 셋째, 믿음 중심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넷째, 확신 중심입니다. 루터에게 성례는 신자의 양심을 위로하는 자리였습니다. 인간은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루터의 성례론은 종교개혁에 매우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무엇보다 성례를 다시 복음의 중심에 놓으려 하였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루터는 성례를 통해 하나님께서 지금도 죄인에게 말씀하시고 다가오신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루터는 성례를 통해 구원의 확신 문제를 새롭게 재배치하였습니다. 확신은 인간의 공로나 감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양심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성례론에도 긴장은 남아 있었습니다. 루터는 여전히 유아세례를 유지하였고, 국가교회 체제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또한 성만찬 문제를 둘러싸고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갈등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 가운데 하나는, 성례를 다시 "복음의 사건"으로 이해하려 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정리: 루터는 성례를 없앤 것이 아니라 되찾고자 했다

  루터는 성례를 부정하려 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성례를 다시 복음의 자리로 돌려놓으려 했습니다. 루터에게 성례는 교회의 통제 장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다가오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성례의 중심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루터의 성례론은 결국 이런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실제인가?" 루터는 성례를 통해 그 질문에 답하려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죄인에게 다가오시며, 말씀하시며, 자신을 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루터가 성례를 다시 붙들었던 이유였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루터가 성례를 일곱 개에서 두 개로 재정리한 것은 단순히 숫자를 줄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 참된 성례인가를 다시 묻는 작업이었습니다. 루터는 성례의 기준을 인간 전통이나 교회 제도에서 찾지 않고,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제정과 복음의 약속에서 찾고자 하였습니다. 따라서 세례와 성만찬은 단순히 남겨진 두 의식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 구조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자리로 이해되었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 전체의 방향과도 연결됩니다. 중세교회에서 성례는 인간 삶 전체를 관리하는 구조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성례를 다시 말씀과 약속 중심으로 재배치하려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성례의 권위 근거가 교회의 제도와 사제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약속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특히 루터는 세례와 성만찬 안에서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자신을 주신다고 보았습니다. 세례는 죄인을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성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복음의 사건입니다. 따라서 루터가 남긴 두 성례는 단순히 축소된 성례 체계가 아니라, 복음의 현재성과 구원의 확신을 집중적으로 드러내는 중심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루터의 성례론은 종교개혁의 핵심을 잘 보여줍니다. 종교개혁은 단순히 교회의 제도를 줄이거나 파괴하는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어떻게 다가오시는가를 다시 묻고, 그 중심을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위에 다시 세우려는 시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