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하이델베르크 신조 56강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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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강: 주기도문 (3) (125문-126문)

 

125문: 네 번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간구입니다 “우리의 몸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주시며, 그리하여 오직 주님이 모든 좋은 것에 근원임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이 복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염려나 노력 심지어 주님의 선물조차도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함을 알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어떤 피조물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신뢰하게 하옵소서.”

 

 네 번째 간구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입니다. 그 필요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바로 일용할 양식, 곧 하루치의 양식입니다. 이는 단지 음식만이 아니라,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에 필요한 은혜와 자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아시는 분이며, 그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때로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필요 이상으로 쌓아두려 하거나, 정작 필요하지 않은 것도 집착하기도 합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하루치만 거두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먹지도 못할 것을 쌓아두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매일매일 주어지는 은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어제 받은 은혜로 오늘을 대신할 수 없고, 오늘의 은혜를 내일로 미룰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루하루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염려를 싫어하지만, 실제로는 염려 속에 살아갑니다. 많은 경우, 지금 당장의 문제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합니다. 실제로 벌어진 일을 해결하려는 고민은 '생각'이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앞서 두려워하는 것은 '염려'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일어나지 않은 일로 마음을 소모하기보다는, 현재 주어진 일에 집중하며 지혜를 구하는 것이 믿음의 모습입니다. 물질적인 필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 돈이나 필요한 자원을 구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분명히 우리에게 물질을 위한 기도가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다만, 그 목적은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그리고 감사의 삶으로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기도는 우리 마음의 동기를 점검하는 자리입니다. 내가 지금 바라는 것이 정말 필요인지, 혹은 욕심인지 돌아보게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욕망이 아니라 은혜를 따라 사는 삶으로 이끌림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물질을 구할 때, 그것은 곧 모든 것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고백이 됩니다. 자급자족하려는 교만이 아니라, 겸손히 의지하는 마음을 키워가는 것이죠. 마치 자녀가 아버지께 용돈을 부탁하듯,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는 것이 믿음의 표현입니다.

마지막으로, 물질을 구하는 기도는 단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한 선한 목적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기도는 우리를 더 겸손하게 만들며, 물질을 은혜로 보고 살아가는 감사의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126문: 다섯 번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간구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주의 은혜의 증거로 인해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시사 우리의 모든 죄과와 여전히 우리 안에 있는 부패를 불쌍한 죄인인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간구는 하나님께 죄 사함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표현 속에는, ‘우리가 받은 용서를 기억하며 그 용서를 따라 이웃을 용서하겠다’는 다짐과 실천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자격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이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삶은, 다른 사람에게도 그 은혜를 흘려보내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받은 은혜는 나누는 은혜로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7장 3-4절에서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죄를 짓고 네게 돌아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용서란 세 번이나 일곱 번으로 한정된 행동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마 18:22)”고 하십니다. 이는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 용서는 삶의 태도이며, 은혜로 체질이 바뀌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용서는, 상대가 용서를 구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그 사람에 대해 품은 분노와 상처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let go)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기도 전에,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용서이며, 우리가 따라야 할 본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용서에 인색합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와서 사과하기 전까지는 용서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이때 용서는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힘의 대결, 용서가 아니라 굴복시키려는 시도가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랑으로 용서하신 자리이지, 힘으로 제압하신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에서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고도,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한 종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탕감받은 종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전적으로 용서받았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죄사함의 은혜, 즉 복음의 본질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 종은 정작 자신에게 적은 빚을 진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그 결과 주인의 분노를 사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시며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이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용서받은 자로서 용서를 베풀지 않는다면, 이미 받은 은혜마저 무효가 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은혜는 단지 받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응답해야 하는 선물입니다. 용서는 구원받은 자의 열매이며, 구원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표지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은혜를 가볍게 여긴 자로서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를 받아주어야 한다(롬 15:7)”는 말씀처럼, 용납과 용서는 구속의 복음을 살아내는 방식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삶은, 받은 복음을 부인하는 삶입니다.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간구는 단순한 형식적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드러내는 시금석이며, 은혜에 응답하는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고백입니다.

  요약하면, 용서는 도덕율이 아니라, 복음의 실천입니다.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다른 이의 허물 앞에서도 십자가를 기억합니다. 용서는 관계를 회복시키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하는 훈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