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강: 주기도문 (4) (127문-128문)
127문: 여섯 번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간구입니다. “우리 자신만으로는 너무나 연약하여 우리는 한 순간도 스스로 설 수 없사오며, 우리의 불구 대천의 원수인 마귀와 세상과 우리의 육신은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나이다. 그러하므로 주의 성령의 힘으로 우리를 친히 붙드시고 강하세 하셔서, 우리가 이 영적 전쟁에서 패하여 거꾸러지지 않고,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우리의 원수에게 항상 굳세게 대항하게 하시옵소서.
여섯 번째 간구는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영적 전쟁’이라는 표현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일부 개신교 단체나 은사주의 흐름, 혹은 가톨릭의 ‘구마사제(퇴마신부, exorcist)’의 사역과 연결지어 이 개념을 제한적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집단들 - 예컨대 신사도운동이나 인터콥 같은 극단적 흐름 - 은 ‘영적 전쟁’을 비성경적인 방식으로 왜곡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된 사용 때문에 성경적인 진리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영적 전쟁’은 신앙생활의 본질에 속한 실제적 개념입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식하든 하지 않든, 성경은 신앙생활을 전쟁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마 4장). 그 시험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신자들이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시험의 구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 역시 시험의 현실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이러한 시험이 얼마나 교묘하고 일상적인지를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시험은 비상한 사건이 아니라, 보통의 날들 속에서 은밀히 다가옵니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가?’ 문제는 ‘영적 전쟁’의 개념이 사라질 때, 진짜 적을 놓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아군을 적으로 여기기도 하고, 진짜 적을 두둔하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를 판단하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미워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결과, 마귀와 세상과 육신이 아니라, 의견이 다른 형제자매, 나의 이익을 침해하는 사람이 적처럼 여겨지는 위험이 생깁니다.
이러한 왜곡은 오늘날 기독교가 종종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친목을 다지는 장소로 여기고, 신앙생활을 삶의 윤활유나 취미처럼 여기는 풍조가 만연합니다. 이렇게 되면 ‘영적 전쟁’이라는 개념은 설 자리를 잃습니다. 더 나아가, 외부적인 요소들 곧 다른 문화, 이념, 종교를 악마화(demonization) 하는 실수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외부에 있는 적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육신적 욕망과 교만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전쟁입니다.
시험은 단지 인생의 어려운 상황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게 하려는 유혹이며, 인간의 자율성을 과신하게 하는 함정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 26:41).” 이 기도는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보호하심을 통해서만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도 내시는 분입니다(고전 10:13). 그러므로 이 기도는 단지 상황의 회피가 아니라, 하루하루 믿음으로 싸우며 살아가는 ‘신앙의 결단’입니다.
128문: 당신은 이 기도를 어떻게 마칩니까?
답: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라는 간구로 마칩니다. 주님은 우리의 왕이시고 만물에 대한 권세를 가진 분으로서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며 또한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구하옵니다. 이로써 우리가 아니라 주님의 거룩한 이름이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우리는 매일의 기도에서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런데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이 표현으로 기도를 마치라고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치치신 내용, 즉 ‘주기도문’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마지막 부분은 ‘송영(Doxology)’, 곧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찬양의 선언입니다. 비록, 마태복음 6장의 일부 고대 사본에는 이 송영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 오늘날 성경에는 대괄호로 처리하거나 각주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이 송영을 기도의 필수적인 마무리로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왜 ‘송영’으로 기도를 마칠까요? 이 마지막 구절은 단순한 찬양 이상의 신앙 고백이며, 기도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요약해 줍니다. 첫째, “나라”를 고백함으로써, 기도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백성임을 인정합니다. 이 기도는 “나의 나라(ego)”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구하는 백성의 고백입니다. 둘째, “권능(권세)”을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신뢰합니다. 기도는 내가 할 수 없음 것은 인정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셋째, “영광”을 고백함으로써 기도자는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선언합니다. 기도 응답을 통해 내가 영광받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말은, 기도의 마침말이자 동시에 기도자의 영적 자세를 요약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 속에는 두 가지 신앙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 응답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이고(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다른 하나는 우리 삶의 주재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하나님이 나의 삶과 세계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단지 기도의 끝맺음이 아니라, 기도의 정점이며 우리의 신앙 방향을 다시 확인하는 영적 선언입니다.
기도는 요구서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백성됨’을 선포하는 선언서입니다. 그 선언을 마무리하며, 우리는 다시 하나님을 높이는 송영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분이 이 모든 기도의 응답자이시며, 우리의 삶과 세계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면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하고 기도합니다.
57강: 주기도문 (4) (127문-128문)
127문: 여섯 번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간구입니다. “우리 자신만으로는 너무나 연약하여 우리는 한 순간도 스스로 설 수 없사오며, 우리의 불구 대천의 원수인 마귀와 세상과 우리의 육신은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나이다. 그러하므로 주의 성령의 힘으로 우리를 친히 붙드시고 강하세 하셔서, 우리가 이 영적 전쟁에서 패하여 거꾸러지지 않고,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우리의 원수에게 항상 굳세게 대항하게 하시옵소서.
여섯 번째 간구는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영적 전쟁’이라는 표현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일부 개신교 단체나 은사주의 흐름, 혹은 가톨릭의 ‘구마사제(퇴마신부, exorcist)’의 사역과 연결지어 이 개념을 제한적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집단들 - 예컨대 신사도운동이나 인터콥 같은 극단적 흐름 - 은 ‘영적 전쟁’을 비성경적인 방식으로 왜곡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된 사용 때문에 성경적인 진리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영적 전쟁’은 신앙생활의 본질에 속한 실제적 개념입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식하든 하지 않든, 성경은 신앙생활을 전쟁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마 4장). 그 시험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는 곧 신자들이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시험의 구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 역시 시험의 현실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이러한 시험이 얼마나 교묘하고 일상적인지를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시험은 비상한 사건이 아니라, 보통의 날들 속에서 은밀히 다가옵니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가?’ 문제는 ‘영적 전쟁’의 개념이 사라질 때, 진짜 적을 놓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아군을 적으로 여기기도 하고, 진짜 적을 두둔하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를 판단하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미워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결과, 마귀와 세상과 육신이 아니라, 의견이 다른 형제자매, 나의 이익을 침해하는 사람이 적처럼 여겨지는 위험이 생깁니다.
이러한 왜곡은 오늘날 기독교가 종종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친목을 다지는 장소로 여기고, 신앙생활을 삶의 윤활유나 취미처럼 여기는 풍조가 만연합니다. 이렇게 되면 ‘영적 전쟁’이라는 개념은 설 자리를 잃습니다. 더 나아가, 외부적인 요소들 곧 다른 문화, 이념, 종교를 악마화(demonization) 하는 실수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외부에 있는 적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육신적 욕망과 교만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전쟁입니다.
시험은 단지 인생의 어려운 상황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게 하려는 유혹이며, 인간의 자율성을 과신하게 하는 함정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 26:41).” 이 기도는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보호하심을 통해서만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도 내시는 분입니다(고전 10:13). 그러므로 이 기도는 단지 상황의 회피가 아니라, 하루하루 믿음으로 싸우며 살아가는 ‘신앙의 결단’입니다.
128문: 당신은 이 기도를 어떻게 마칩니까?
답: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라는 간구로 마칩니다. 주님은 우리의 왕이시고 만물에 대한 권세를 가진 분으로서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며 또한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구하옵니다. 이로써 우리가 아니라 주님의 거룩한 이름이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우리는 매일의 기도에서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런데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이 표현으로 기도를 마치라고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치치신 내용, 즉 ‘주기도문’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마지막 부분은 ‘송영(Doxology)’, 곧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찬양의 선언입니다. 비록, 마태복음 6장의 일부 고대 사본에는 이 송영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 오늘날 성경에는 대괄호로 처리하거나 각주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이 송영을 기도의 필수적인 마무리로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왜 ‘송영’으로 기도를 마칠까요? 이 마지막 구절은 단순한 찬양 이상의 신앙 고백이며, 기도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요약해 줍니다. 첫째, “나라”를 고백함으로써, 기도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백성임을 인정합니다. 이 기도는 “나의 나라(ego)”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구하는 백성의 고백입니다. 둘째, “권능(권세)”을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신뢰합니다. 기도는 내가 할 수 없음 것은 인정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셋째, “영광”을 고백함으로써 기도자는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선언합니다. 기도 응답을 통해 내가 영광받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말은, 기도의 마침말이자 동시에 기도자의 영적 자세를 요약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 속에는 두 가지 신앙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 응답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이고(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다른 하나는 우리 삶의 주재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하나님이 나의 삶과 세계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단지 기도의 끝맺음이 아니라, 기도의 정점이며 우리의 신앙 방향을 다시 확인하는 영적 선언입니다.
기도는 요구서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백성됨’을 선포하는 선언서입니다. 그 선언을 마무리하며, 우리는 다시 하나님을 높이는 송영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분이 이 모든 기도의 응답자이시며, 우리의 삶과 세계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면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