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강: 착한 행실- 은혜에 대한 응답 (2) (89문-91문)
89문: 옛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을 진노케 한 우리의 죄를 마음으로 슬퍼하고 더욱더 미워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죄인 줄 알지만 마음은 여전히 죄를 즐기는 상태는, 마치 신분은 변했지만 마음과 행동은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와도 같습니다. 말하자면, 신분과 역할 행동 사이의 부조화는 ‘문화지체 현상’과도 유사합니다. 문화지체 현상이란 기술과 같은 물질문화는 빠르게 발전하지만, 이를 사용하는 법이나 규범과 같은 비물질문화는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생기는 사회적 부조화 현상을 말합니다. 이러한 부조화가 해결되기까지는 꽤 오래동안 교육과 훈련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배우고 훈련하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훈련의 내용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와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뉘우치는 것이나, 잘못했다고 ‘이실직고’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삶의 방향을 돌이키고 다시 되돌아 서지 않는 것, 진화론적 세계관에서 창조론적 세계관으로 세계관을 바꾸는 것,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진노케한 우리의 죄를 마음으로 슬퍼하고, 더욱더 미워하여 피할 수 있게 됩니다.
90문: 새사람으로 다시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마음으로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사람'을 입고 살아가는 '새로운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사도 바울의 삶은 '새로운 삶'의 전형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지녔던 옛 사람의 모습을 철저히 벗어 버리고, 온전히 새 사람을 입고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빌립보서에 기록된 그의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 난 후 더 이상 바리새인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바리새인들이 입고 다니던 화려한 옷도 벗어버렸을 것입니다. 대신 그는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성도들에게도 자신처럼 예전의 삶의 방식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를 옷 입듯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나니 이전에 그가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들이 마치 배설물처럼 느껴졌습니다. 예전에는 애지중지하던 것이 이제는 손으로 만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눈으로 보는 것마저 불쾌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스도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고, 그리스도가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것이 새로운 삶의 핵심인데, 그리스도 중심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마음으로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을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91문: 그런데 선행이란 무엇입니까?
답: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서 그리고 그의 영광을 위하여 행한 것만을 선행이라 하며,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사람의 계명에 근거한 것은 선행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서 여러 곳에서 착한 행실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행위'를 애써 무시하며 착한 행실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선행'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선행은 구원의 필수조건이 아닙니다. 다만, 선행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필수적입니다. 이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알려주는 말씀은 마태복음 21장에 기록된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임금으로부터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로 인해 주인은 노하여 그 종을 옥졸들에게 넘겨 빚을 다 갚도록 했습니다. 이 비유는 선행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선행이란 바로 받은 은혜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선행은 단순한 도덕적 의무나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응답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받은 무한한 용서와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는 것이 바로 선행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선행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
성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군인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도 그의 백성을 '군대'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러한 성경 말씀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군사 또는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떤 훈련이 필요할까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감사와 회개를 강조하면서 그 구체적인 방법이 선행이라고 제시합니다.
바울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하면서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생각의 방식' 또는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또 '세상을 따르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죄인들이 살아가는 방식 또는 이전의 자기 중심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그리스도 중심적 새로운 사고방식을 갖추는 것, 이것이 회개의 온전한 의미입니다.
옛 사람의 사고방식이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진화론적 세계관이라면, 새 사람의 사고방식은 사랑과 평화, 용서와 은혜가 지배하는 창조론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관이 바뀔 때, 선행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살아가는 모습인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행위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중에도 그리스도인보다 더 너그럽게 베풀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선행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외적인 행위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행위의 동기와 마음가짐, 그리고 그 행위가 가져오는 영적인 결과까지 고려해야 할까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92문 이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41강: 착한 행실- 은혜에 대한 응답 (2) (89문-91문)
89문: 옛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을 진노케 한 우리의 죄를 마음으로 슬퍼하고 더욱더 미워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죄인 줄 알지만 마음은 여전히 죄를 즐기는 상태는, 마치 신분은 변했지만 마음과 행동은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와도 같습니다. 말하자면, 신분과 역할 행동 사이의 부조화는 ‘문화지체 현상’과도 유사합니다. 문화지체 현상이란 기술과 같은 물질문화는 빠르게 발전하지만, 이를 사용하는 법이나 규범과 같은 비물질문화는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생기는 사회적 부조화 현상을 말합니다. 이러한 부조화가 해결되기까지는 꽤 오래동안 교육과 훈련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배우고 훈련하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훈련의 내용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와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뉘우치는 것이나, 잘못했다고 ‘이실직고’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삶의 방향을 돌이키고 다시 되돌아 서지 않는 것, 진화론적 세계관에서 창조론적 세계관으로 세계관을 바꾸는 것,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진노케한 우리의 죄를 마음으로 슬퍼하고, 더욱더 미워하여 피할 수 있게 됩니다.
90문: 새사람으로 다시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마음으로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사람'을 입고 살아가는 '새로운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사도 바울의 삶은 '새로운 삶'의 전형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지녔던 옛 사람의 모습을 철저히 벗어 버리고, 온전히 새 사람을 입고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빌립보서에 기록된 그의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 난 후 더 이상 바리새인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바리새인들이 입고 다니던 화려한 옷도 벗어버렸을 것입니다. 대신 그는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성도들에게도 자신처럼 예전의 삶의 방식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를 옷 입듯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나니 이전에 그가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들이 마치 배설물처럼 느껴졌습니다. 예전에는 애지중지하던 것이 이제는 손으로 만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눈으로 보는 것마저 불쾌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스도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고, 그리스도가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것이 새로운 삶의 핵심인데, 그리스도 중심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마음으로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을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91문: 그런데 선행이란 무엇입니까?
답: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서 그리고 그의 영광을 위하여 행한 것만을 선행이라 하며,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사람의 계명에 근거한 것은 선행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서 여러 곳에서 착한 행실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행위'를 애써 무시하며 착한 행실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선행'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선행은 구원의 필수조건이 아닙니다. 다만, 선행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필수적입니다. 이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알려주는 말씀은 마태복음 21장에 기록된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임금으로부터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로 인해 주인은 노하여 그 종을 옥졸들에게 넘겨 빚을 다 갚도록 했습니다. 이 비유는 선행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선행이란 바로 받은 은혜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선행은 단순한 도덕적 의무나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응답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받은 무한한 용서와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는 것이 바로 선행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선행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
성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군인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도 그의 백성을 '군대'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러한 성경 말씀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군사 또는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떤 훈련이 필요할까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감사와 회개를 강조하면서 그 구체적인 방법이 선행이라고 제시합니다.
바울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하면서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생각의 방식' 또는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또 '세상을 따르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죄인들이 살아가는 방식 또는 이전의 자기 중심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그리스도 중심적 새로운 사고방식을 갖추는 것, 이것이 회개의 온전한 의미입니다.
옛 사람의 사고방식이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진화론적 세계관이라면, 새 사람의 사고방식은 사랑과 평화, 용서와 은혜가 지배하는 창조론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관이 바뀔 때, 선행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살아가는 모습인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행위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중에도 그리스도인보다 더 너그럽게 베풀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선행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외적인 행위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행위의 동기와 마음가짐, 그리고 그 행위가 가져오는 영적인 결과까지 고려해야 할까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92문 이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