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사 특강: 중세 여성의 삶과 작품으로부터 배우는 신앙과 영성 (2) 노르위치의 줄리안
1. 노르위치의 줄리안, 그녀는 누구인가?
많은 중세 여성신학자들 가운데 선택된 중세 여성 신학자는 노르위치의 줄리안 (Julian of Norwich, 1342-1416)입니다. 그녀는 잉글랜드의 동부 해안가 노퍽(Norfolk)주 노르위치에서 출생했고, 리처드 롤(Richard Rolle, 1300-1349), 월터 힐튼(Walter Hilton, 1340-1396), ‘무지의 구름’의 저자(Unknown Author of The Cloud of Unknowing)와 함께 14세기 영국 신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줄리안이 남긴 『사랑의 계시』는 Paulist Press에서 출간한 서양영성고전총서(The Classics of Western Spirituality)의 제1권을 차지할만큼 서양 영성사에서 매우 중요한 고전으로 평가받습니다. 줄리안은 중세 유럽에서 활동한 여성신학자 가운데, 특히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시에나의 카타리나(Catherine of Siena, 1347-1380)와 동시대를 살았습니다. 줄리안은 1342년에, 카타리나는 1347년에 태어났으므로, 줄리안의 사상과 영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4세기 영국의 상황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1066년,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브리튼 섬을 정복하고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정치적 관계는 복잡한 긴장 속에서 전개되었습니다. 프랑스 왕의 시각에서는 영국 왕이 자기의 신하이지만, 영국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프랑스 영토 일부를 소유한 왕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훗날 백년전쟁(1337-1453)의 원인이 되면, 동시에 노르위치 지역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075년 영국의 주교회의에서 “주교들은 교구의 주요 도시에 본당을 가져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이에 따라 1094년 이스트 앵글리아 지역의 주교좌가 텟포드에서 노르위치로 옮겨지게 됩니다. 노르위치는 모직물 산업과 향구, 운하의 발달로 인해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였고, 런던 다음으로 큰 도시로 자리 잡게 됩니다.
줄리안이 활동하던 시기는 존 위클리프(1320년경-1384)와 그의 제자 그룹으로 알려진 롤라드가 활동하고 시기와 일치합니다. 줄리안은 영국에서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던 위클리프의 활동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줄리안 당시 노르위치에서는 롤라드를 박해하는 사건이 있었고, 줄리안의 독거수도처에서 보이는 곳에 롤라드를 화형시켰던 장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4세기 영국신비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당시의 독특한 역사적 상황이 ‘14세기 영국신비주의’라는 경향을 만들어낸 것으로 설명합니다. 말하자면, 영국의 상황도 유럽대륙 만큼이나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그 복잡한 상황들 가운데는, 흑사병, 프랑스와의 백년전쟁(1337-1453), 와트 타일러의 난이라고도 알려진 농민반란(1381)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 줄리안의 신학적 중요성과 현대적 평가
1) 『사랑의 계시』의 위상: 줄리안은 비록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박사로 공식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현대의 영성가과 신학자들은 줄리안이 남긴 『사랑의 계시』를 그리스도교 영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로 평가합니다.
2) 토마스 머튼의 평가: 특히 『칠층산』의 저자이며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영적 저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줄리안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1962년 3월 초에 노틀담의 마데레바(Sister M. Madeleva) 에게 보낸 편지에서 노르위치의 줄리안의 위대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줄리안은 의심할 바 없이 모든 그리도인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목소리를 낸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나이를 더해감에 따라 내 눈에는 그녀가 점점 더 위대하게 보입니다. 오래 전 한 때 나는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푹 빠져 있었지만, 만약 당신이 나에게 이 세상과 인도와 모든 스페인 신비가들을 한데 묶어 한 다발로 준다고 하여도 지금은 줄리안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1)
3) 성공회 전통에서 성인으로 인정: 줄리안은 이처럼 위대한 신학자이자 신비가롯, 영국 성공회는 그녀를 성인(Saint)으로 추대하였고, 매년 5월 8일을 축일로 기념합니다. 이는 『사랑의 계시』 제 2장에 따라 1373년 5월 8일 그녀가 계시를 받은 날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로마 가톨릭에서는 5월 13일을 축일로 기념하기도 하는데, 이는 일부 사본에 줄리안이 5월 13일에 계시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 Thomas Merton, Witness to Freedom: The Letters of Thomas Merton in Times of Crisis (New York: Farrar, Straus, Giroux, 1994), 26.
3. 노르위치의 줄리안 생애와 성 줄리안 교회
1) 줄리안의 독거수도처와 캐로우 수도원의 해체: 약 40여년의 기간동안 줄리안이 실제로 머물렀던 거처의 모습은 현재 남아있지 않습니다. 종교 개혁의 시대에 영국의 국왕 헨리 8세가 교황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하고 해산시켰을 때, 노르위치의 캐로우 수도원이 해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 줄리안 교회 내부와 연결되어 있었던 줄리안의 독거수도처(Julian’s Cell)도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비록 줄리안의 거처는 허물어졌으나, 예배당 건물은 영국 성공회에 귀속되어 계속해서 사용되었습니다.
2) 제2차 세계대전과 교회의 파괴: 그러나, 2차세계 대전이 진행되던 1942년 공중 폭격에 의해서 성 줄리안 교회의 예배당 마저도 파괴되었습니다. 노르위치에는 이미 많은 교회가 있었기에 예배당 건물이 부족한 형편이 아니어서 성 줄리안 교회를 재건할 필요성이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3) 교회건축물 재건과 순례지로서의 재탄생: 그러나 노르위치에서 약 20마일 정도 떨어진 디칭햄(Ditchingham) 성직자 회의의 지지를 얻어 주임 신부였던 폴 래이볼드(Paul Raybould)의 주도로, 줄리안의 영적 유산을 기억하고자 1953년에 성 줄리안 교회가 순례지로 재건되었습니다. 이는 『사랑의 계시』를 읽고 영적 감화를 받은 이들이 줄리안의 자취를 역사 속에서 보존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4. 『사랑의 계시』 와 『마저리 켐프의 서』
노르위치의 줄리안은 누구이며 그녀가 저술한 『사랑의 계시』(Showings 또는 Revelation of Love)는 어떤 책이기에 2차 세계대전의 전황에서 공중폭격으로 이미 폐허가 되었기에 없어져도 그만일 것 같은 조그마한 교회를 재건하여 순례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한 것일까요? 영문학에서는 중세 영어로 된 최초의 작품을 남긴 여성 문필가로, 신학에서는 14세기 영국이 낳은 최고의 신비가이자 신학자로, 여성학에서는 삼위로 일체되신 하나님의 모성을 강조한 여성주의자로 노르위치의 줄리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단 한권의 책 『사랑의 계시』를 남긴 14세기 영국의 여성 영성가가 20세기 최고의 영성가로부터 가장 위대한 영국 신학자라는 찬사를 받는다는 사실로부터 그녀의 신학 사상에 대하여 소개해야 할 필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줄리안 교회를 찾는 순례자들이 노르위치의 줄리안이 남긴 『사랑의계시』를 꼼꼼하게 읽었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남긴 저술에서는 그녀의 생애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해주는 단서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녀의 생애에 대해서 더 많은 궁금증을 갖을 수도 있습니다. 영미권에서는 최근까지도 줄리안의 신학사상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지만, 생애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연구서가 크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줄리안의 생애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려주는 1차 사료가 좀처럼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녀들이나 여성 박사들과는 달리 줄리안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이유는 고백신부에 의해서 성인전이 쓰여진 것도 아니고, 줄리안 자신이 자서전을 남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계시』에서 줄리안의 생애와 관련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다고 한다면, 서른 살 무렵에 흑사병으로 인하여 죽음의 문턱에서 두 번의 병자성사를 받았을 정도로 위중한 상황에서 그 환시체험을 했다는 것 정도 뿐입니다.
린의 마저리 켐프(Margery Kempe of Lynn, 1373-1438 이후)가 남긴 『마저리 켐프의 서』(The Book of Margery Kempe)는 줄리안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마저리 켐프는 줄리안의 명성을 듣고는 순례를 하는 일정 가운데 노르위치를 방문하였고, 줄리안과 만나서 나눈 대화의 일부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마저리 켐프가 직접 인용한 줄리안의 말은 줄리안의 생애와 신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마저리 켐프의 서』가 줄리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가 자료가 되는 까닭은 줄리안의 영성생활 형태인 독거수도가 사막의 수도자들과 같이 세상과 동떨어져서 완전한 은둔적 삶을 추구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영적지도를 제공하면서 세상과 소통하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저리 켐프는 자신이 여러날 동안 줄리안과 함께 지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이 전했받은 영적 가르침을 직접 인용하여 줄리안의 목소리를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주고 있습니다.
당신과 같은 징표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성령이 자신의 영혼에 거하고 있다고 굳건히 믿어야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회개의 눈물과 컴패션과 헌신의 마음을 주신다면 그는 성령이 자신의 영혼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성 바울이 말했듯이 성령은 우리를 위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눈물로 간구하십니다. 즉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너무나 많은 슬픔과 눈물로 간구하고 기도하게 만들어서 그 눈물 방울을 다 셀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악령은 절대 이런 징표를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 제롬이 말했듯이 지옥의 고통보다 악마를 더 괴롭히는 것은 눈물이기 때문입니다.2)
2) Margery Kempe, The Book of Margery Kempe, trans. by John Skinner (New York: Image, 2014), 74-75.
마저리 켐프가 전해주는 줄리안의 목소리를 들을 때 간과하기 쉬운 것은 사실은 중세 여성 은둔수도자가 자신을 방문한 여성에게 그리스도교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두 사람의 이름과 함께 그들이 했던 말을 인용하여 신학적 견해를 피력하면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14세기의 관점에서 보면 주목할 만한 일인데, 왜냐하면 당시에는 글을 읽고 쓸줄 알았던 여성들이 많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신학은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저리 켐프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줄리안은 글을 읽고 쓸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신학자들의 글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 인용할 만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사랑의 계시』에는 신학자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첫장부터 마지막 86장까지 그 내용을 묵상하면서 읽어내려가다 보면 삼위일체 신학을 강조하는 교부들의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5. 오늘의 줄리안: 고통의 시대에 전하는 희망과 위로의 신학
줄리안의 특별함은 단순히 교부들의 전통을 충실하게 따라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몸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독특한 표현들을 사용하여 전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줄리안의 구원론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어머니이신 예수 그리스도” 개념은 다른 신학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 ‘어머니’라는 표현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출산과 모유수유, 곧 여성의 몸 경험을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연결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당하신 그 고난을 새생명을 탄생시키는 출산의 고통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곧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모유로 비유합니다. 줄리안은 어머니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설명하기 위해 몸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성육신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육신의 어머니들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태어나서 고생하다가 죽게 할 뿐이지만, 참되신 어머니 예수님, 완전한 사랑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기쁨과 영생 안으로 데려가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랑 안에서 예수님 자신 안에 우리를 양육해주시며 평생 수고하시다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큰 고통과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일을 마치시고 우리를 행복하게 태어나게 하셨지만, 그것도 그분의 놀라운 사랑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만일 더 많은 고난을 당할 수 있다면 더 많이 고난당하겠다"는 사랑의 말씀이 이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더 이상 죽으실 수 없지만, 일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를 기르셔야 합니다. 이는 모성의 귀중한 사랑이 그분을 우리의 채무자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젖을 물릴 수 있지만, 귀중한 어머니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님 자신을 먹이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참 생명의 귀중한 양식인 복된 성례전으로 우리를 먹이십니다. 또 모든 사랑스러운 성례전으로 자비하고 은혜롭게 우리를 부양해주십니다. 이것이 "나는 거룩한 교회가 너에게 전하고 가르치는 자이다"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성례전들의 모든 활력과 생명, 내 말의 모든 능력과 은혜, 너를 위해 거룩한 교회 안에 정해져 있는 모든 선, 그것이 나이다"라는 말입니다. (제 60장)3)
3) Julian of Norwich, Showing of Love, 엄성옥 역, 『하나님 사랑의 계시』 (서울: 은성출판사, 2007), 291-292
현대의 영성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줄리안의 저작을 단순한 신비주의적 체험이 아니라, 고통의 시대를 통과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살아 있는 신학’으로 해석합니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그녀를 “가장 위대한 기독교적 목소리 중 하나”로 평가하며, 줄리안의 글에서 시대를 초월한 깊은 신앙의 통찰을 발견하였던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입니다. 줄리안은 단지 개인의 체험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해석하며, 그것을 시대와 사람들에게 나누는 신학자였다. 우리가 고통과 상실, 혼란 속에 있을 때, 줄리안의 말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위로와 확신을 건네고 있습니다.
중세교회사 특강: 중세 여성의 삶과 작품으로부터 배우는 신앙과 영성 (2) 노르위치의 줄리안
1. 노르위치의 줄리안, 그녀는 누구인가?
많은 중세 여성신학자들 가운데 선택된 중세 여성 신학자는 노르위치의 줄리안 (Julian of Norwich, 1342-1416)입니다. 그녀는 잉글랜드의 동부 해안가 노퍽(Norfolk)주 노르위치에서 출생했고, 리처드 롤(Richard Rolle, 1300-1349), 월터 힐튼(Walter Hilton, 1340-1396), ‘무지의 구름’의 저자(Unknown Author of The Cloud of Unknowing)와 함께 14세기 영국 신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줄리안이 남긴 『사랑의 계시』는 Paulist Press에서 출간한 서양영성고전총서(The Classics of Western Spirituality)의 제1권을 차지할만큼 서양 영성사에서 매우 중요한 고전으로 평가받습니다. 줄리안은 중세 유럽에서 활동한 여성신학자 가운데, 특히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시에나의 카타리나(Catherine of Siena, 1347-1380)와 동시대를 살았습니다. 줄리안은 1342년에, 카타리나는 1347년에 태어났으므로, 줄리안의 사상과 영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4세기 영국의 상황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1066년,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브리튼 섬을 정복하고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정치적 관계는 복잡한 긴장 속에서 전개되었습니다. 프랑스 왕의 시각에서는 영국 왕이 자기의 신하이지만, 영국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프랑스 영토 일부를 소유한 왕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훗날 백년전쟁(1337-1453)의 원인이 되면, 동시에 노르위치 지역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075년 영국의 주교회의에서 “주교들은 교구의 주요 도시에 본당을 가져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이에 따라 1094년 이스트 앵글리아 지역의 주교좌가 텟포드에서 노르위치로 옮겨지게 됩니다. 노르위치는 모직물 산업과 향구, 운하의 발달로 인해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였고, 런던 다음으로 큰 도시로 자리 잡게 됩니다.
줄리안이 활동하던 시기는 존 위클리프(1320년경-1384)와 그의 제자 그룹으로 알려진 롤라드가 활동하고 시기와 일치합니다. 줄리안은 영국에서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던 위클리프의 활동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줄리안 당시 노르위치에서는 롤라드를 박해하는 사건이 있었고, 줄리안의 독거수도처에서 보이는 곳에 롤라드를 화형시켰던 장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4세기 영국신비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당시의 독특한 역사적 상황이 ‘14세기 영국신비주의’라는 경향을 만들어낸 것으로 설명합니다. 말하자면, 영국의 상황도 유럽대륙 만큼이나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그 복잡한 상황들 가운데는, 흑사병, 프랑스와의 백년전쟁(1337-1453), 와트 타일러의 난이라고도 알려진 농민반란(1381)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 줄리안의 신학적 중요성과 현대적 평가
1) 『사랑의 계시』의 위상: 줄리안은 비록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박사로 공식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현대의 영성가과 신학자들은 줄리안이 남긴 『사랑의 계시』를 그리스도교 영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로 평가합니다.
2) 토마스 머튼의 평가: 특히 『칠층산』의 저자이며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영적 저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줄리안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1962년 3월 초에 노틀담의 마데레바(Sister M. Madeleva) 에게 보낸 편지에서 노르위치의 줄리안의 위대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줄리안은 의심할 바 없이 모든 그리도인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목소리를 낸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나이를 더해감에 따라 내 눈에는 그녀가 점점 더 위대하게 보입니다. 오래 전 한 때 나는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푹 빠져 있었지만, 만약 당신이 나에게 이 세상과 인도와 모든 스페인 신비가들을 한데 묶어 한 다발로 준다고 하여도 지금은 줄리안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1)
3) 성공회 전통에서 성인으로 인정: 줄리안은 이처럼 위대한 신학자이자 신비가롯, 영국 성공회는 그녀를 성인(Saint)으로 추대하였고, 매년 5월 8일을 축일로 기념합니다. 이는 『사랑의 계시』 제 2장에 따라 1373년 5월 8일 그녀가 계시를 받은 날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로마 가톨릭에서는 5월 13일을 축일로 기념하기도 하는데, 이는 일부 사본에 줄리안이 5월 13일에 계시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 Thomas Merton, Witness to Freedom: The Letters of Thomas Merton in Times of Crisis (New York: Farrar, Straus, Giroux, 1994), 26.
3. 노르위치의 줄리안 생애와 성 줄리안 교회
1) 줄리안의 독거수도처와 캐로우 수도원의 해체: 약 40여년의 기간동안 줄리안이 실제로 머물렀던 거처의 모습은 현재 남아있지 않습니다. 종교 개혁의 시대에 영국의 국왕 헨리 8세가 교황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하고 해산시켰을 때, 노르위치의 캐로우 수도원이 해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 줄리안 교회 내부와 연결되어 있었던 줄리안의 독거수도처(Julian’s Cell)도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비록 줄리안의 거처는 허물어졌으나, 예배당 건물은 영국 성공회에 귀속되어 계속해서 사용되었습니다.
2) 제2차 세계대전과 교회의 파괴: 그러나, 2차세계 대전이 진행되던 1942년 공중 폭격에 의해서 성 줄리안 교회의 예배당 마저도 파괴되었습니다. 노르위치에는 이미 많은 교회가 있었기에 예배당 건물이 부족한 형편이 아니어서 성 줄리안 교회를 재건할 필요성이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3) 교회건축물 재건과 순례지로서의 재탄생: 그러나 노르위치에서 약 20마일 정도 떨어진 디칭햄(Ditchingham) 성직자 회의의 지지를 얻어 주임 신부였던 폴 래이볼드(Paul Raybould)의 주도로, 줄리안의 영적 유산을 기억하고자 1953년에 성 줄리안 교회가 순례지로 재건되었습니다. 이는 『사랑의 계시』를 읽고 영적 감화를 받은 이들이 줄리안의 자취를 역사 속에서 보존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4. 『사랑의 계시』 와 『마저리 켐프의 서』
노르위치의 줄리안은 누구이며 그녀가 저술한 『사랑의 계시』(Showings 또는 Revelation of Love)는 어떤 책이기에 2차 세계대전의 전황에서 공중폭격으로 이미 폐허가 되었기에 없어져도 그만일 것 같은 조그마한 교회를 재건하여 순례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한 것일까요? 영문학에서는 중세 영어로 된 최초의 작품을 남긴 여성 문필가로, 신학에서는 14세기 영국이 낳은 최고의 신비가이자 신학자로, 여성학에서는 삼위로 일체되신 하나님의 모성을 강조한 여성주의자로 노르위치의 줄리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단 한권의 책 『사랑의 계시』를 남긴 14세기 영국의 여성 영성가가 20세기 최고의 영성가로부터 가장 위대한 영국 신학자라는 찬사를 받는다는 사실로부터 그녀의 신학 사상에 대하여 소개해야 할 필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줄리안 교회를 찾는 순례자들이 노르위치의 줄리안이 남긴 『사랑의계시』를 꼼꼼하게 읽었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남긴 저술에서는 그녀의 생애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해주는 단서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녀의 생애에 대해서 더 많은 궁금증을 갖을 수도 있습니다. 영미권에서는 최근까지도 줄리안의 신학사상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지만, 생애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연구서가 크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줄리안의 생애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려주는 1차 사료가 좀처럼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녀들이나 여성 박사들과는 달리 줄리안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이유는 고백신부에 의해서 성인전이 쓰여진 것도 아니고, 줄리안 자신이 자서전을 남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계시』에서 줄리안의 생애와 관련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다고 한다면, 서른 살 무렵에 흑사병으로 인하여 죽음의 문턱에서 두 번의 병자성사를 받았을 정도로 위중한 상황에서 그 환시체험을 했다는 것 정도 뿐입니다.
린의 마저리 켐프(Margery Kempe of Lynn, 1373-1438 이후)가 남긴 『마저리 켐프의 서』(The Book of Margery Kempe)는 줄리안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마저리 켐프는 줄리안의 명성을 듣고는 순례를 하는 일정 가운데 노르위치를 방문하였고, 줄리안과 만나서 나눈 대화의 일부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마저리 켐프가 직접 인용한 줄리안의 말은 줄리안의 생애와 신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마저리 켐프의 서』가 줄리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가 자료가 되는 까닭은 줄리안의 영성생활 형태인 독거수도가 사막의 수도자들과 같이 세상과 동떨어져서 완전한 은둔적 삶을 추구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영적지도를 제공하면서 세상과 소통하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저리 켐프는 자신이 여러날 동안 줄리안과 함께 지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이 전했받은 영적 가르침을 직접 인용하여 줄리안의 목소리를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주고 있습니다.
당신과 같은 징표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성령이 자신의 영혼에 거하고 있다고 굳건히 믿어야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회개의 눈물과 컴패션과 헌신의 마음을 주신다면 그는 성령이 자신의 영혼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성 바울이 말했듯이 성령은 우리를 위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눈물로 간구하십니다. 즉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너무나 많은 슬픔과 눈물로 간구하고 기도하게 만들어서 그 눈물 방울을 다 셀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악령은 절대 이런 징표를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 제롬이 말했듯이 지옥의 고통보다 악마를 더 괴롭히는 것은 눈물이기 때문입니다.2)
2) Margery Kempe, The Book of Margery Kempe, trans. by John Skinner (New York: Image, 2014), 74-75.
마저리 켐프가 전해주는 줄리안의 목소리를 들을 때 간과하기 쉬운 것은 사실은 중세 여성 은둔수도자가 자신을 방문한 여성에게 그리스도교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두 사람의 이름과 함께 그들이 했던 말을 인용하여 신학적 견해를 피력하면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14세기의 관점에서 보면 주목할 만한 일인데, 왜냐하면 당시에는 글을 읽고 쓸줄 알았던 여성들이 많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신학은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저리 켐프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줄리안은 글을 읽고 쓸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신학자들의 글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 인용할 만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사랑의 계시』에는 신학자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첫장부터 마지막 86장까지 그 내용을 묵상하면서 읽어내려가다 보면 삼위일체 신학을 강조하는 교부들의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5. 오늘의 줄리안: 고통의 시대에 전하는 희망과 위로의 신학
줄리안의 특별함은 단순히 교부들의 전통을 충실하게 따라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몸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독특한 표현들을 사용하여 전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줄리안의 구원론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어머니이신 예수 그리스도” 개념은 다른 신학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 ‘어머니’라는 표현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출산과 모유수유, 곧 여성의 몸 경험을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연결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당하신 그 고난을 새생명을 탄생시키는 출산의 고통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곧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를 모유로 비유합니다. 줄리안은 어머니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설명하기 위해 몸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성육신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육신의 어머니들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태어나서 고생하다가 죽게 할 뿐이지만, 참되신 어머니 예수님, 완전한 사랑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기쁨과 영생 안으로 데려가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랑 안에서 예수님 자신 안에 우리를 양육해주시며 평생 수고하시다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큰 고통과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일을 마치시고 우리를 행복하게 태어나게 하셨지만, 그것도 그분의 놀라운 사랑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만일 더 많은 고난을 당할 수 있다면 더 많이 고난당하겠다"는 사랑의 말씀이 이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더 이상 죽으실 수 없지만, 일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를 기르셔야 합니다. 이는 모성의 귀중한 사랑이 그분을 우리의 채무자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젖을 물릴 수 있지만, 귀중한 어머니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님 자신을 먹이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참 생명의 귀중한 양식인 복된 성례전으로 우리를 먹이십니다. 또 모든 사랑스러운 성례전으로 자비하고 은혜롭게 우리를 부양해주십니다. 이것이 "나는 거룩한 교회가 너에게 전하고 가르치는 자이다"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성례전들의 모든 활력과 생명, 내 말의 모든 능력과 은혜, 너를 위해 거룩한 교회 안에 정해져 있는 모든 선, 그것이 나이다"라는 말입니다. (제 60장)3)
3) Julian of Norwich, Showing of Love, 엄성옥 역, 『하나님 사랑의 계시』 (서울: 은성출판사, 2007), 291-292
현대의 영성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줄리안의 저작을 단순한 신비주의적 체험이 아니라, 고통의 시대를 통과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살아 있는 신학’으로 해석합니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그녀를 “가장 위대한 기독교적 목소리 중 하나”로 평가하며, 줄리안의 글에서 시대를 초월한 깊은 신앙의 통찰을 발견하였던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입니다. 줄리안은 단지 개인의 체험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해석하며, 그것을 시대와 사람들에게 나누는 신학자였다. 우리가 고통과 상실, 혼란 속에 있을 때, 줄리안의 말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위로와 확신을 건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