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지식이 삶으로 실천되고 우리 삶을 변화되게 해야 우리 신앙의 정당성이 입증되고 기독교 지성이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주류 지성이 되는 역사적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신앙은 지성과 조화를 이루어야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실천이 수반되어야 그 진정성이 증명됩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으로 복음 전파를 시작하셨습니다.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는 반성과는 다른 것입니다. 성경은 변화된 삶을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회개도 사랑도 헌신도 모두 실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본문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라고 반복하여 말씀하면서 신앙의 실천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 말씀을 유대인 그리스도인 들에게 보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었고 오순절 성령 체험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일정 시간이 지나면서 복음에 대한 감격과 열정이 식어지면서 유대인 특유의 형식주의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1. 구원 받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야고보 사도는 14절에서 ‘구원 얻을 수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에는 ‘실천이 동반되지 않는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겠느냐’라는 강한 문제 제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바울의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일관된 가르침과 상반된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의 ‘오직 믿음’은 십자가 대속의 은혜의 완전성을 믿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 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충분한 은혜이기 때문에 이를 믿기만 하면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논리 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구원론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논리입니다.
그렇다고 실천을 강도하는 야고보의 가르침이 바울의 논리를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오직 믿음의 논리는 불신자들이 처음 복음을 들을 때 들려주는 내용입니다. 특히 유대교의 율법의 준수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율법주의에 대하여 복음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점을 강조한 논리입니다. 이에 반해 야고보의 주장은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주는 신앙교육적 교훈입니다. 또 야고보 사도의 말씀은 신앙의 진정성에 대한 문제 제기입니다. 겉모습만 신앙인일 뿐 실재로는 믿음이 없을 때 그런 형식적인 믿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칼 뱅은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 그러나 그 믿음은 언제나 실천과 함께 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라고 하셨고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3:15-23) 신앙생활을 연기하듯 하는 사람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더 나아가 이 단어는 위선자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연기하듯 하게 되면 처음에는 남을 속이지만 다음에는 자신도 기만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고 이런 사람은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옳게 보 이려하나 그 속에는 온갖 불법이 가득하다고 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믿음은 진실한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믿음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2. 지식의 실천
신앙생활에 있어서 지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의 시작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인식으로부터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 앙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은 영혼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신앙을 반석 위에 서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 기 때문이라”(빌 3:8)고 하며 거룩한 지식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실천으로 이어질 때에 의미가 있습니다. 때 때로 우리는 지식인의 위선과 변절을 볼 때 매우 실망하고 분개하게 됩니 다. 지식이 정의를 실천하지 못하고 불의에 가담할 때 역사는 혼돈에 빠 지고 세상은 부패하게 됩니다. 신앙에 있어 거룩한 지식은 너무나 중요합 니다. 바른 인식이 없이는 바른 신앙도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지식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룩한 지식이 삶으로 실 천되고 우리 삶을 변화되게 해야 우리 신앙의 정 당성이 입증되고 기독교 지성이 세상을 바꾸는 새 로운 주류 지성이 되는 역사적 변화가 일어날 것 입니다. 신앙은 지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실 천되어야 합니다.
3. 실천의 능력
믿음의 지식을 실천하는 능력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우리는 누구나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 하고 싶은 의지를 가지고 있고 또 적잖게 노력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 하는도다”(롬 7:20)라고 토로한 것처럼 매일 악의 도구가 되어버린 자신에 대하여 실망감을 가지 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실패의 타성에 젖어 아예 거룩한 실천을 포기하거나 스스로 정한 타협의 틀 안에 안주하려 시도하기도 합니다. 이런 패배주의적 자세는 우리 영혼을 결국 구원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의 두 가지 충고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먼저는 실천의 중요성에 대한 재확인입니다. 영혼이 내 몸을 떠나면 우리는 그를 죽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처럼 실천이 없는 신앙은 신앙으로서의 가치와 능력이 상실된 죽은 것이 됩니다.(26절) 또 한 가지는 순종과 실천이 너무 나 중요하지만 실천의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 의지하는 철저한 신앙이 필요합 니다. 우리는 신앙적 삶이 훌륭한 분들을 볼 때마다 ‘성품이 좋아서, 경험이 풍부해서 또는 의지가 견고해서’ 믿음의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요소들이 영향이 클 수도 있지만 그것들이 결정적 변수는 아닙니다. 욥은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어리석고 교만한 자신을 발견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욥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고 말하면서 욥의 승리도 하나님께서 주신 긍휼의 선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의 의지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는 없습니다. 한순간 방심하면 우리는 자기 욕심의 노예가 되고 잠시 기도를 멈추면 무능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 4:7-8)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렇게 사는 능력 또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만 의지하여 순종과 실천의 길을 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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