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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9
기독교, 전염병에 맞서다

 조선에 기독교가 전해진 19세기 말에는 한반도 전역에 콜레라, 천연두, 말라리아 등의 급성전염병 4-5 종류가 번갈아 주기적으로 유행하고 있었다. 이는 서구 열강의 조선 진출과 무관하지 않은 일이었다. 바이러스는 사람을 타고 이동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전염병 중 가장 맹위를 떨쳤던 콜레라는 1821년부터 1910년까지 10차례 이상 대확산을 반복했는데 조선인들에게 면역력이 없었던 초기에는 전파력도 막강했고 치사율도 7-80%에 이르렀다. 이때 의료선교사들은 전염병 방역과 치료를 이끌면서 서구의 의학지식을 조선사회에 보급했다.
 당시 조선인 사이에는 질병을 일으키는 것이 악귀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다. 조선인들은 질병에 걸리면 무당이나 맹인을 찾아갔고, 콜레라 예방을 위해 고양이 그림이나 시체를 부적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콜레라 귀신이 쥐 귀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본 의료선교사들은 조선인의 무지를 한탄하면서 조선의 위생관념을 개선하는 것에 국가의 존폐까지도 걸려있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의료선교사들의 임무는 단순히 환자를 치료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넘어 조선인의 질병관념을 바꾸고 과학적 지식을 전수하는 일로 확장되었다. 선교사들은 순한글로 ‘천연두와 예방주사’, ‘모기와 말라리아’, ‘이와 장티푸스’, ‘벼룩과 재귀열’, ‘파리와 장티푸스’, ‘이질’, ‘십이지장충 및 다른 기생충과 인분을 사용하는 논밭’ 등의 책을 1910년까지 연이어 출판하면서 조선사회를 일깨워 나갔다. 그리고 그 사이 2-3차례 발생한 콜레라의 유행은 조선인들이 선교사를 비롯한 기독교인의 말과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기독교를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1885년 콜레라가 퍼지기 시작하자 알렌은 조선 정부에 “집 안팎을 청소하고, 하수구에 석회를 뿌리며, 방안에는 유황을 태우는 등 소독을 철저히 하고, 물은 반드시 끓인 것을 마실 것”을 골자로 하는 방역조치를 요청하였다. 콜레라의 감염경로를 생각하면 매우 당연한 조치였다. 하지만 과학적 방역에 익숙하지 않은 대부분의 조선인은 여전히 미신에 기대며 이 조치를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알렌의 권고를 지키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망자가 나타나자 위생의 중요성이 조선사회에 서서히 인식되기 시작했다.
 10년 뒤인 1895년 다시 콜레라의 대 확산이 시작되었다. 조선 정부는 아예 애비슨과 커틀러(Mary M. Cutler) 선교사에게 방역 책임을 위임했다. 애비슨과 커틀러는 전국에 ‘콜레라를 일으키는 것은 악귀가 아니라 세균’이라는 공고문을 붙였다. 그리고 동료 선교사들과 피병원(환자격리병원)을 운영하여 환자를 돌보는 동시에 전염병의 확산을 막았다. 그 결과 전염병과 건강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조금씩 조선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의 권고를 따르며 집과 주변 공간을 청결하게 하고 음식을 통한 전염을 주의하였다.
 교인들은 교인들 나름대로 전염병의 확산을 막고 환자를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서대문 밖의 피병원을 담당했던 언더우드는 자신이 설립한 새문안교회의 교인 중 남성 10명을 선발해 “적십자 콜레라대”를 운영했다. 태극문양 위에 십자가를 새긴 배지를 단 콜레라대의 주요 임무는 시체 운반, 환자 간호, 시내 소독이었다. 콜레라대의 헌신적인 활동을 지켜보던 주민들은 “예수쟁이들은 무엇 때문에 한시도 쉬지 않고 밤낮으로 일하는가”라며 감탄했다.
 물론 여전히 한계가 분명했다. 피해의 규모를 줄일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성과를 낸 것은 또 아니었다. 또한 선교사의 방역조치가 일사분란하게 시행된 것도 아니었다. 일례로 서울의 사대문의 경비 포졸에게 과일과 채소의 유입을 막으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포졸들이 안일하게 통과시키면서 콜레라가 더욱 확산하기도 했다. 결국 서울에서만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약 300명 정도가 수용되었던 피병원에서는 절반 이상의 환자가 사망했다. 아쉽고 슬픈 일이지만 원래 첫걸음부터 대단한 성과가 나타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며 모든 변화는 크기와 상관없이 위대한 법이다.